▲1933년 자싱(가흥) 피난처에서 김구, 이동녕, 엄항섭
국사편찬위원회
"하등의 책임이 없다" 석연찮은 진상조사 결과
"본 건의 책임자는 지주칭 한 사람인 것으로 판명되어 조소앙·김철 2인은 하등의 책임이 없다."
1933년 1월 15일에 개최된 제6차 한독당 대회에서 조소앙과 김철은 <시사신보>에 안창호 비난 기사를 사주했다는 혐의를 벗었다. 대신 "조소앙과 김철, 김석 등에게서 들어 아는 것"이라고 변명했던 중국인 지주칭의 '단독 행위'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시사신보>에 지주칭이 직접 사죄문을 올리게 하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항저우 판공처 습격 사건이 일단락됐다.
그러나 진상조사 결과는 왠지 석연찮다. 조소앙·김철이 모든 혐의를 벗었다고 하지만, 문일민 등이 판공처를 습격해 추궁했을 당시 그들 스스로 혐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건 직후 조소앙·김철이 책임을 지고 국무위원직에서 사퇴했던 것을 보면 이들에게 정말 '하등의 책임'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이들에게 내려진 '무혐의' 결론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판공처 습격 사건 이후 자싱파를 견제하기 위해 상하이파와 항저우파가 다시 손을 잡았던 사실에서 미뤄봤을 때 결국 김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타협을 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당시 김구가 한독당과 대립적 관계에 있던 한국혁명당 세력을 이용해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6차 대회에서는 김구 세력(박찬익·안공근·엄항섭)이 새로운 표적이 됐다. 임시정부와 한독당 업무에 대한 '직무유기'로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 결국 이들의 거취 문제가 도마 위에 올라왔다.
다만 김구는 독립운동의 원로인데다 상하이를 떠나 자싱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일제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예외로 하고, 나머지 인사들에 대해서만 한독당 이사직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로 인해 한독당 내에서 김구 세력의 입지는 매우 약화됐다. 대신 이사장 송병조 이하 이유필·최석순·김두봉·장덕로·차리석·박창세·김현구 등 흥사단 출신들이 대거 간부로 재선출됐다.
즉 한독당 내에서 김구 세력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주도권이 송병조·이유필 등 상하이파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송병조·이유필 등과 함께 '대한교민단'을 이끌던 문일민 역시 해당 대회에서 감사(監事)로 선출되는 등 간부급으로 진출했다.
교민단 이끌며 친일파 처단 공작
대한교민단은 임시정부의 감독을 받으며 상하이 한인들의 교육·위생·직업 소개·민적(民籍) 증명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자치기관이었다. 한편 국내에서 선거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이므로 각 도별 임시의정원 의원 선출의 기능도 대행하는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이기도 했다.
문일민은 1933년 4월 27일 개최된 이사회에서 송병조(정무위원장)·박창세와 함께 정무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교민단은 정무위원 3인의 합의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구조였다. (3인 중 1인이 정무위원장)
새롭게 선출된 지도부는 프랑스 관헌을 상대로 한인들의 체포 및 석방 문제에 대해 교섭하는 한편 치안조직인 '의경대'를 동원하여 그해 8월 친일 밀정 석현구를 암살하고 상하이 한국인친우회 위원장 유인발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친일파 처단에 앞장섰다.
그런데 그해 8월 정무위원장 송병조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로 피신하는 바람에 교민단 조직이 붕괴 위기에 처했다. 이때 문일민은 홀로 상하이에 남아 교민단을 이끌며 혼란에 빠진 교민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