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진 어촌계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김창옥씨
변상철
김창옥씨의 고향은 강원도 옥계 금진2리라는 곳이다. 비단결 같은 바닷빛을 가졌다 해서 '금진(錦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로부인이 등장하는 향가 <헌화가>의 길로 유명한 그 마을도 50~60년대에는 먹고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다. 김씨 역시 금진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뒤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미처 마치지도 못하고 주문진으로 나와 한 1년 살다가 다시 여기 거진으로 이사 왔죠. 거진으로 와서 아버지는 명태잡이 배를 탔는데, 저는 아버지가 명태잡이 할 때 같이 바닷가에 나가서 그물 손질하는 일을 하면서 가사 일을 도와야 했어요.
우리 형제가 6남매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자식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형제가 다 그렇게 일을 해야 했어요. 지금은 맨 위에 형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그 밑에 넷째는 집안이 어려우니 약을 먹고 죽어버렸어요."
김창옥씨가 처음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오징어 배부터였다고 한다. 김씨 나이 18살이었다. 처음 탔던 오징어 배는 주로 연안에서 작업하던 소형 선박이었다. 저녁에 출항해 밤새 밝은 등불이 켜진 배에서 오징어를 잡다가 다음 날 새벽이 되면 다시 거진항으로 돌아오는 작업이었다.
밤새 작업한 뒤 집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이고 오후가 되면 다시 도시락을 준비해 오징어 배를 타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오징어 배 조업을 하던 김씨는 1967년 겨울에 처음으로 명태잡이 배였던 순광호를 탔다고 한다.
"순광호를 탄 건 납북될 때 처음 탄 거에요. 순광호를 처음 타고 조업해서 나가 바로 납북된 것이죠. 그때가 67년도 11월 3일 납북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26일 돌아왔어요. 두 달가량 있었던 것 같아요."
1967년 12월 27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지난 11월 3일 동해어로저지선 근해에서 북괴에 납북됐던 어선 11척과 선원 65명이 26일 하오 1시경 휴전선을 넘어와 53일간의 억류 끝에 자유를 되찾았다. 이날 돌아온 거진항 소속 금창호 등 어선 11척은 휴전선 근해에서 우리 해군 83함 708정과 63함으로부터 간단한 검색을 받고 26일 하오 11시쯤 거진항에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여러 척이 같이 잡혔어요"
당시 순광호는 선장 장득실을 비롯해 8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김씨는 납북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순광호는 명태잡이 배로 연안에서 주로 작업했는데, 작업할 때 조금 북쪽으로 올라간 상황이었나 봐요. 그때 같이 작업하던 배들이 꽤 많았는데 그물 작업하던 배는 안 잡혀가고 낚시질로 고기를 잡던 배만 잡혔어요. 순광호 말고도 여러 척이 같이 잡혔어요.
'까질이'라는 이북 쾌속정이 쏜살같이 오더니 선장만 놔놓고 우리는 배 칸 안에다가 다 밀어 넣더라고요. 그리고는 곧장 우리 배를 끌고 이북으로 가더라고요. 순광호가 목선 동력선인데 속도가 5노트 정도밖에 안 나가는 느린 배예요.
'까질이'가 다가와서는 총을 들고 위협하더라고요. 그때가 막 해가 뜨고 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 배 시동을 끄게 하더니 끌고 올라가더라고요. 그때 선원들이 한 8명 정도 타고 있었어요. 들어가 보니까 큰 힝구가 아니라 작은 어촌 마을 같은 곳의 항구로 가더라고요."
북한군은 어두워질 때까지 항구에서 머물게 한 뒤, 캄캄한 어둠을 이용해 선원들을 배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미리 대기해 있던 트럭에 선원들을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명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침을 먹었는데 나중에 원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함께 납치되었던 선박의 선원 모두가 함께 이동했다고 한다.
식사가 끝나자 선원 모두를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한참을 데려갔는데, 도착한 곳은 바로 평양이었다. 선원들이 도착한 곳은 휴양지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 건물에 선박별로 나뉘어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이 제공하는 누빈 옷으로 갈아입게 하더니, 선원들이 입고 왔던 옷은 모두 북한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했다.
"평양에 간 뒤로는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어요. 김일성 생가라는 곳도 데려가고, 농촌 같은데 데리고 가서 협동농장 같은 곳을 보여주더라고요. 많이는 다니지도 않고 그렇게 몇 군데만 다녔어요. 휴양소 내에 여관 같은 곳에 있으면서 북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강의 같은 것도 들어야 했는데 아주 지루했어요. 그런데 선원들이 개별적으로 따로 불려가서 교육을 받거나 한 것은 없었어요."
김씨가 납북되어 북한에서 억류 생활을 한 지 두 달가량 되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선원들을 차에 태웠다고 한다. 선원들을 태운 차량이 도착한 곳은 납북되어 처음 도착한 작은 어촌마을의 항구였다.
그곳에서 환영회가 열리고 환영회가 끝나자 선원들 모두 각자 타고 온 선박에 승선하게 한 뒤 남한으로 귀환되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김씨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기쁨에 당시 어떻게 남한으로 내려왔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한국 해경의 안내를 받으며 거진항으로 돌아왔다. 거진항으로 돌아온 김씨 일행은 항구를 가득 채운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선원들 모두는 곧장 준비되어 있던 차량에 탑승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말 한번 나눠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라도 사과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