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그림.
National Library Israel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소외는 네 가지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우선 생산활동과 인간 고유의 '유적 본성'에서 소외된다. 인간은 본래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유적 존재'인데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받고 생존을 위해 노동하게 되는 순간, 노동은 자기 삶을 실현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지루하고 무의미한 과정이 된다는 얘기다.
거기에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다른 노동자들과 임금이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면 동료 노동자들로부터도 소외되게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어떻게 '왕따'로 만드나?'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 시즌3 ①]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오마이뉴스)
법률사무소에서 필경사로 일하기 전 바틀비는 워싱턴의 우편물 반송센터에서 일했다고 전한다. 주인없는 우편물을 분류해 소각하는 작업환경이 바틀비를 우울한 인간으로 만들었을 거라 화자는 추측한다.
그것이 단순반복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절망감을 유발하는 환경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무상감을 느끼게하는 환경 속에서 희망을 품는 인간이 되기란 힘들다. 천성적으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하다. 바틀비의 정신이상 증세는 그의 노동 이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살기 위해 한 일이 죽음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노동이 자기 삶을 실현하는 것과 무관하게 지루하고 무의미한 과정이 될 때 인간 영혼은 병들고 종국에는 노동에서 소외된다는 칼 마르크스의 일침은 바틀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바틀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시스템,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얼마나 무심하고 무자비한가.
바틀비의 고용주는 고생없이 살아온 자본가다. 하지만 바틀비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지상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나는 그가 적어도 악덕 고용주는 아니라 생각한다.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자본가의 전형이긴 해도 그는 바틀비가 죽는 순간을 지켜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다는 걸 안타까워했다.
내면의 싹
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실업급여 신청과정을 밟았다. 구직활동을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특기는 무엇인지, 구직에 도움이 될 만한 경력에는 뭐가 있는지 되새겨봤다. 짧은 글 몇 문장으로 압축된 나의 이력을 노동시장에 내놔야 하는 현실을 떠올리자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대목을 떠올리며 막연하나마 희망을 갖기로 했다. 새들이 구치소 안마당에 풀씨를 하나둘 떨어뜨리고 날아가자 어느 날 갑자기 두터운 벽돌 틈으로 부드러운 싹이 트는 풍경을 묘사한 이 대목에서 언젠가는 두터운 벽을 뚫고 솟아날 지도 모를 내 내면의 싹을 떠올렸다.
지난 27일 고용센터에 실업인정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나마 이런 복지제도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앞서간 수많은 바틀비들 그리고 산재사고를 겪은 무수한 노동자들의 희생 덕분이라 생각했다. 다음 달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해보리라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