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5년째 도돌이표를 유지하고 있는 금연 정책부터 바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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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후로 나는 한숨을 쉬고 싶을 때면 라이터를 찾았다. 담배는 어느덧 기쁠 때든 슬플 때든 함께하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오래된 베프와 절교를 한다는 뜻이다. '담배 끊는 독한 인간하고는 상종도 하지 마라'는 말들이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자못 합당한 격언으로 떠도는 배경이다.
그러니 함께하는 흡연자 중에 금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새해가 되고 언제 금연을 선포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피울 때면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정하게 불을 붙여주었다. '안락한 지옥에서 우리 함께 하자꾸나, 너의 금연 실패를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아, 불신의 늪은 참으로 안락했던 것이다. 남편은 달랐다. 그는 나의 금연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 순도 백퍼센트의 믿음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그는 모를 것이다. 우리가 구했던 신혼집에서 내가 반한 포인트가 어디였는지.
빌라 꼭대기 층에 위치한 그 집에는 우리만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는 넓은 옥상이 딸려 있었다. 옆으로는 봉산이, 앞으로는 북한산이 보이는 그 전망에 나는 반했다.
'아, 이 집이다! 여기서 담배를 실컷 피워야겠어!'.
느즈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집안일 끝내놓고 드립 커피 한잔 내려서, 바람을 음미하며 피우는 담배 맛이란! 길티 플레저는 2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믿음이 눈을 가렸는지 남편은 그동안 내가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불 위에 떨어진 라이터를 남편이 발견했다. 금연 약속을 믿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배신감과 서운함에 치를 떨었다. 당황스럽다. 이럴 때는 적반하장으로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
"니 친구들 보지 않았어? 금연이 그렇게 쉬우면 왜 니 친구들이 여태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겠어. 너는 한 번이라도 나를 흡연자로 인정한 적이 없어. 내가 여자라서 담배 피는 게 쪽팔려서 그랬던 거 아냐? 여태 나를 비흡연자라고 믿어왔던 게 더 이상해. 담배 냄새가 정말 안 났다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거겠지. 언젠가는 알아서 끊겠지 하면서. 정말 당신이 나의 금연을 원한다면 덮어 놓고 믿을 게 아니라 실제로 금연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줬어야지. 금연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숨어서 피는 내 마음은 생각해봤느냐고!"
아, 지금 생각해봐도 완벽한 방어였다. 격렬한 토론 끝에 그는 나를 흡연자로 먼저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금연 100일에 성공하면 노트북을 사주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시 한 번, 나는 세게 나갔다.
"아니, 나는 마시멜로우 실험에서 실패하고 말 거야. 나는 먼 미래의 떡고물을 상상하며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담배를 피우면 그 자체로 즉각 보상이 주어지는데, 내가 왜 백일 뒤의 노트북을 상상하며 흡연 욕구를 참아야 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상을 미리 당겨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야. 금연을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노트북을 사줘. 대신 금연에 실패하면 노트북을 다시 가져가. 나는 뺏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정말로 나를 변하게 한 것
그렇게 노트북을 바꿨으니 이제는 내가 바뀌어야 할 차례였다. 일단 5년째 도돌이표를 유지하고 있는 금연 정책부터 바꾸기로 했다. 나 혼자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먼저 도전한 것은 금연 보조제 챔픽스. 이 약의 장점은 초반에는 약을 먹으면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점이다.
십년지기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 기간에 나는 옥상에 나가 환상적인 뷰를 바라보며 담배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일주일 뒤 본격 금연 기간이 되면 약의 복용량을 높여야 한다. 이 시기에 나는 끝없는 악몽에 시달렸다. 자지 않고 영화를 서너 편씩 몰아본 느낌으로 깨어났다. 죽을 맛이었다. 의사한테 가서 약을 바꿔달라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임신을 계획 중인 시점이기도 했다. "저, 악몽을 이렇게 많이 꾸게 하는 향정신성 의약품을 임신 계획 중에 먹어도 괜찮을까요?" 이 물음에 나이 든 남자 의사가 내 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도 흡연 중에 임신하는 것보다야 낫겠죠." 이게 말인가 똥인가. 약을 일단 처방받기는 했으나 영 못 미더웠다.
다른 병원의 여자 의사는 답했다. 임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먹지 말아야 하고, 임신하기 6개월 전부터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의 종류를 바꿔봐야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금연 보조제, 탈락!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금연 상담 전화를 찾았다. 큰 기대는 없었다. 흡연은 뇌가 니코틴에 중독된 생화학적 현상이므로, 말 몇 마디 나누는 걸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첫 통화에서 이미 단맛을 봤다. 먼저 상담사는 니코틴 의존도 체크를 위해 몇 가지를 물었다. 이 정도면 의존도가 높지 않으니 충분히 금연할 수 있을 거라는, 형식적이지만 살가운 격려를 해주었다.
상담사는 내가 전화한 의지 자체를 높이 사 주었다. 한 것도 없이 칭찬을 들어서 괜히 머쓱해졌다.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상담사는 나의 금연 의지를 믿어주었다. 믿어주는 것이 직업인 그녀는 하루에도 금연에 실패한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말이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보조제가 있으면 30퍼센트, 의지만으로는 3퍼센트가 금연에 성공한다고 한다. 희망에 베팅하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상담사는 최소한 입으로는 금연하겠다는 의지를 믿어준다. 그 직업적인 믿음이 내게는 든든한 뒷배로 다가왔다. 하루 실패하더라도, 다시 금연을 이어서 하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한 반응이었다.
상담사는 내게 믿음을 가불해주었다. 어느 순간 내가 그 믿음을 저버린다 하더라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그간의 노력을 상기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단 한 사람. 귀찮지만 살가운 그녀의 전화를 나는 기다리게 되었다. 3일, 7일, 한 달, 백일……1년이 지났다.
그리고 금연 4년째, 지금 나는 금연 선물로 받은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꿈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안에서 쌓아올린 신뢰를 잃고 싶지 않다. 얼굴 모를 상담사가 심어준 믿음의 씨앗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