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 4가영단주택의 큰 길 중 하나인 문래동 4가의 길거리 모습. 멀리 문래동 교회가 보인다.
이영천
주택규모를 갑(20평), 을(15평), 병(10평), 정(8평), 무(6평)로 구분하여 민족과 계급으로 차별한다. 갑과 을은 분양으로 일본인 관리 몫, 임대인 병, 정, 무는 조선인 직원과 노동자 몫이다. 갑, 을, 병에는 욕실을 정, 무는 50호 단위로 공동목욕탕을 두었다.
주택이 공장으로 변했을 뿐, 영단주택 흔적이 문래동 4가에 그대로 남았다. 1960년대까지 가내수공업형 섬유공장이 이를 차지했었고, 1970년대 청계천에서 철공소 등이 이주해오면서 현재 토지이용으로 굳어진다. 크고 작은 기계·금속 공장과 점포 일색이다.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굴뚝산업 대부분이 남동, 반월, 시화공단으로 빠져나갔어도 문래동 철강산업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문래 창작촌
문래동 3가 큰길가에 이곳을 아우르는 공간 '문래 창작촌' 안내판이 보인다. 옛 방적공장 자리 남단 작은 언덕에, 두엇이 걷기에도 벅차 보이는 너비의 일정 간격으로 난 곧은 골목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골목 안 작은 공장이나 점포, 주택이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집들이 바뀌는 중이다. 음식점과 카페, 주점이 자리하면서 공간기능 전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은 공장과 점포가 대낮을 지배한다면, 젊은이 취향으로 전이한 공간은 분명 저녁 시간에 더 활발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