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회의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정부가 공개적으로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면서도, 나아가 '자유와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노동관이 이렇게 편협하게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의 관점이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자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모두 명쾌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첫째,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정부가 '안전운임제'의 기간 연장이나 범위 확대를 진지하게 토론하기는커녕 '업무개시명령' 등으로 강경 대응한 사례를 보자. 우선, 안전운임제란 화물차주에게 적정운임을 보장해 근로여건을 개선하고 과로·과속·과적 운행을 방지하고자 도입한 제도로, 문재인 정부 때 수출입 컨테이너나 시멘트 운송에 한해 3년 일몰제(2020~2022년)로 시작됐다. 따라서 2023년엔 이게 종료 예정이었는데, 화물연대는 처음부터 일몰제가 부당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안전운임제 종료 6개월 전인 2022년 6월, 화물연대가 파업에 돌입, 일몰제 폐지와 적용 대상 확대(철강, 유조, 자동차 등), 운송료 인상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사태가 악화하자, 정부와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 3년 연장 등 지속 추진에 합의, 파업이 8일 만에 종료된 바 있다. 이제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3년 연장도 불투명해지자, 화물연대는 기존 요구를 고수하며 11월 24일 재파업에 돌입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11월 29일 시멘트 분야에, 또 12월 8일엔 철강, 석유화학 분야에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사실상 '노동 명령'이었다. 일부 화물연대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체포, 구속되자 파업 열기는 급랭했다. 12월 9일 파업 종료 이후 정부는 '법과 원칙', '원점 재검토'만 말하고 있어, 민주적 논의는 매우 불투명하다.
화물연대의 16일 파업으로 경제(생산과 수출, 판매 등)에 끼친 손실액이 무려 10조원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철저한 자본의 관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내린 '업무개시명령'은 경제를 위한 비상조치였다.
그러나 원래 '경제'란 무엇인가?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란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화물운수 노동자(사람)의 살림살이를 잘 돌보는 것이 바른 경제다. 그렇다면 안전운임제 연장과 확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사람)의 요청을 경청하지 않은 채 '업무개시명령'으로 국가가 노동을 강제한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경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는 약 10조원에 이르는 파업 손실을 오로지 자본의 생산, 판매, 수출 차질액으로 계산한 데서도 증명된다. 만일 사람의 관점으로 파업 손실을 말하자면, 건강과 안전을 위한 노동 방식(안전운임제)의 요구를 위한 대책회의와 토론, 스트레스 증대, 2차례 파업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절차적 과정들, 2만 명 넘는 조합원들 조직화 과정에 쓰인 돈과 시간, 에너지, 파업 진행 중 일부 간부와 조합원의 체포와 구속, 그 가족들의 충격과 비애, 업무개시명령 이후의 불안과 공포, 파업 좌절로 인한 스트레스와 무기력함, 그리고 파업 과정에서 드러난 노동자 내부 분열과 파열음 등등, 이 모든 게 파업으로 인한 인간적 손실이다.
과연 이를 단순히 화폐 가치로만 환산할 수 있는가? 인간적 손실을 돈 가치로 환산하는 자체가 자본의 시각이다.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자 노동을 하건만, 자본과 국가로부터 받는 상처는 깊고도 무한하다. 자본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갈등은 단지 잠수하거나 지연될 뿐이다.
게다가 파업 와중인 12월 5일에는 윤 대통령이 비공개회의에서 "불법 행위와 폭력에 굴복하면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며 화물연대 파업이 정부의 눈에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 보였다. 이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민주노총=자유민주주의 파괴 세력=타협 불가 세력'이라 낙인찍은 것, 파업 노동자들을 "자유민주주의를 깨려는 세력"이라 한 것, "이런 세력과는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고 한 것은 국민이 주인이란 뜻에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불법과 폭력은 당연히 문제다. 하지만 그것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는 '낙인찍기'는 그보다 더한 자본의 폭력 아닌가?
이미 1762년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계몽한 바, 국민은 투표로 국가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국가가 국민을 대변하지 않고 공권력을 동원해 자본을 대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법과 폭력이다. 대표적인 예로, 헌법 33조에 명시된 노동3권을 무시하면서 외치는 '자유'나 '상식'은 자본의 자유, 자본의 상식일 뿐이다. 이런 노동관이야말로 "북한의 핵 위협"보다 더 무섭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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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윤 정부의 노동혐오, 철처한 자본의 관점...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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