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코무덤 위령비경남 사천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는 '코무덤 위령비, 입구 오른쪽에 작은 안내판이 있다.(내용은 아래 사진 참조)
이윤옥
지난 23일, 서울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영하 1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필 취재를 위해 경남 사천에 가기로 한 날 아침 일기예보는 전라지역 등 서해안 일대 폭설까지 예보하고 있었다. 취재지인 사천은 폭설과 상관 없지만, 무주 등 폭설 지방을 거치는 고속도로를 타야 했다. 일정을 바꿀까 고민하다가 눈 속이라도 뚫고 가 만나야 할 인물이 있어 약속대로 차를 몰았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한일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인 최진갑 박사였다.
사천이 고향인 최 박사는 자신의 고향땅에 역사 왜곡의 표상으로 서 있는 '耳塚(이총)' 위령비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 1년여 동안 뛰어다니며 해당 관청인 사천시와 협의한 끝에, 본래 이름인 '코무덤'을 찾아온 인물이다.
여기서 잠깐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耳塚'은 우리말로 '귀무덤'으로 귀가 묻혀있는 무덤이다. 그러나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은 '위령비'일 뿐 귀가 묻혀있지는 않다. '耳塚'의 원형은 일본 교토시에 있는 '鼻塚(비총), 일본말로 하나즈카, 코무덤'에서 유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토시에 현존하는 '鼻塚'은 400년 전인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무덤이다. 말만 들어도 섬뜩한 이 참상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국측에서는 1990년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을 중심으로 코무덤의 흙 일부를 봉환하여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묻었다. 이때 코무덤을 나타내는 '鼻塚'이라는 비(碑)를 세웠어야 하지만, 귀무덤을 뜻하는 '耳塚'이라고 새겨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사실 조명군총 옆에 있던 '耳塚' 비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최진갑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겨레>가 2010년 공동 주최한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에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동행 취재한 바 있으며 이후 사천, 부안 호벌치, 일본 교토 등을 오가며 취재하여 수차례에 걸쳐 '교토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둔갑되었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 문제에 전념할 수 없는 형편인지라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고 있던 차에 지난 1월, 최진갑 박사로부터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耳塚'이 '코무덤'으로 바로잡히기까지 최 박사와 수십 차례 소통하며 힘을 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