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성당한약방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윤성효
"이만큼 베푼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20대 중반부터 50년 넘게 이어온, 기대 없이 베풀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
김장하(78, 호 남성 南星)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과 다양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취재해 쓴 책 <줬으면 그만이지>(도서출판 피플파워 간)가 나왔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감독 김현지)를 만든 MBC경남과 함께 김장하 선생에 대해 취재한 내용으로 책을 펴낸 것.
김 선생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를 돕게 되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김주완 기자가 그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책을 썼다. 그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는다.
한약방 가운데 전국 세금 납부 1위... 자가용 없이 자전거 이용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열아홉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고향에서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 진주로 이전했다. 남성당한약방은 50년간 운영되다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닫았다.
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이크로 순서를 호명할 정도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빵을 나눠주기도 했다. 전국 한약방 가운데 세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했는데 이는 그만큼 성실납세를 했던 탓이기도 하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았다.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대신 지역사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명신고등학교를 개교했고, 10여년 간 이사장을 하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또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했던 김 선생은 해산(2021년)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서경방송 주식 포함)을 경상국립대에 기탁했다.
김장하 선생은 1991년 명신고 이사장 퇴임사를 통해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번 돈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평소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눠야 사회에 꽃이 핀다"는 생각으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김 선생은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등을 지냈다. 시민사회, 문화예술, 교육 분야의 든든한 뒷배이자 후원자였다.
시민사회도 김 선생의 '아름다운 기부'를 기억하고 있다. 지역 시민사회·문화예술 단체들은 김 선생의 75회 생일날인 2019년 1월 16일 '고맙습니다'는 제목으로 깜짝 생일잔치를 열었고, 한약방 문을 닫을 무렵 여러 인사와 시민들이 찾아가 인사를 전했다.
김 선생은 늘 겸손했다.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1990년대 첫 민선 진주시장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추대할 시민후보를 뽑았는데 김 선생이 압도적으로 1위가 됐다. 그러나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했다.
주변에서 경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문화상, 경남교육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며 극구 사양했던 적도 있다.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