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모습. 문일민의 삶을 추적하던 중 필자에 의해 발굴된 안경신의 사진이다. 2021년 9월 16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초상화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안경신의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DB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다.
안경신의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때 중국 상하이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편지가 평양지방법원에 도착했다. 발신자는 문일민. 거사 후 무사히 상하이로 피신한 문일민이 안경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폭탄 던진 사람은 여기에 있다"며 자신의 이름과 주소 및 행동 경위 등을 적은 탄원서를 보낸 것이었다.
2심에서 안경신의 형이 대폭 감형된 배경에 문일민의 탄원서가 유효하게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일민은 끝내 탈출하지 못한 채 일제에 붙잡힌 동지를 잊지 않았다(당시 탄원서는 장덕진이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광복단장 이탁과 연서하여 보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일제는 현장을 탈출하여 끝내 잡지 못한 문일민·박태열·장덕진·우덕선 등 나머지 광복군총영 대원들에 대해서는 궐석판결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4년 뒤 밝혀진 사실
평남도청 투탄 의거 14년 뒤인 1934년 10월 상하이에서 박태열이 일제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그를 취조하자 문일민에 대한 새로운 혐의가 드러났다.
거사 직후 다른 동지들과 함께 만주로 탈출한 줄 알았던 문일민은 사실 평양에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의열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문일민은 사건(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말함-인용자 주) 이후 평양에 그대로 잠복하여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잇다가 대정구년(1920년-인용자 주) 십이월 십구일 밤 평양사람으로서는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부내 계리(鷄里) 북금융조합 소사실(北金融組合 小使室)에서 동지 두 명과 자고잇든 중 평양서와 평남보안과의 련합수사대에 포위되여 피차에 교화를 하여 동지의 한 명이엇든 소사 문덕성(文德星)은 경관대의 탄환에 마저죽고 문일민은 다리에 일탄을 마저 중상을 밧고도 현장을 탈출하여 일로 순안(順安)에까지 가서 안식교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약 일개월 동안이나 입원치료하여 가지고 만주로 간 사실이 새로 발견되엿다." - '平壤北金組襲擊도 朴大烈一行 所爲', <조선일보>, 1934.10.29.
위의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양 북금융조합 총격전'은 1920년 12월 23일 군자금 모금과 관공리 암살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 광한단(光韓團) 단원들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강서지단(江西支團)의 도움으로 평양 북금융조합에 은신하고 있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인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위의 기사에서는 사건 발생일자를 1920년 12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해당 사건의 발생일자는 12월 23일이 맞음).
즉 문일민은 평남도청 투탄 의거 성공 후 즉각 탈출하지 않고 평양에 잠복하고 있다가, 12월에 광한단원들과 함께 평양 북금융조합(北金融組合)에서 총격전을 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