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곡 <수업시간>의 가사
안사을
위 노래는 총 12곡의 뮤지컬 중에서 유일하게 밝고 코믹한 장면이다. 4.3사건을 다루다 보니 악곡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는데, 한 학생이 발랄한 곡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해당 악곡이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까지 상상하여 도움을 주었다.
그 학생이 바로 위 악곡의 솔리스트이자 선생님의 역할을 맡은 학생이다.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수업시간> - <43이 생각나요> - <제주여 평화로우라(Finale)>로 이어지는 악곡을 들을 수 있다. 아직 가이드 녹음만 있는 미완성 상태이지만 해당 학생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피곤할 만도 하련만 녹음실은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배꼽을 잡아야만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웃어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학생과 함께 수업 결과물을 만들면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에도 아쉬워하며 거듭해서 녹음을 다시 해 줄 것을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이 행복과 웃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정답은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하 세특)'이다. 한 학생이 해당 교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성장을 했는지 세세하게 적어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즐겁게 모든 과정에 참여한 학생의 세특을 써주는 작업은 때때로 고단하기도 하지만 신날 때도 많다. 해당 학생에게 교사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일종의 편지를 쓰는 느낌이다. 가끔 속을 썩인 학생이지만 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세특을 쓰다 보면 나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까지 든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편한 것은 개인의 수행 정도를 수치화해야 하는 시스템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훌륭히 많은 것을 해낸 학생에게 96점을 줄 것인가, 98점을 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야말로 정말 불필요하고 불편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애초에 대단히 불성실했던 학생이 눈부시도록 성장을 한 경우, 그의 성장을 세세하게 적어주는 것이 병행되겠지만 결국 절대평가의 점수가 80점을 넘지 못하면 성취도는 C가 된다. 정말 노력하고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된 학생에게 72점의 점수를 부여할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세특을 쓰는 작업이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기록부의 내용은 한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총정리가 되어야 하고, 성장의 세밀한 기록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것의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며 아무런 의도가 없는 총체적이며 긍정적인 종합 기록이 되어야 한다.
일반계(인문계) 학교에 담임으로 근무했을 때 해마다 들었던, 상위 20% 정도만 신경 써주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는 말은 그러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 학교는 입시와 경쟁을 지양하고 참 배움을 지향하고 있지만, 평가에서만큼은 그 관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꿈을 꾸어보자면 이렇다. 학생의 선발은 대학이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의 행동이나 교과 세부 능력을 기록할 때, 입학사정관 등에게 보여줄 목적인 아닌 진정으로 한 학생의 변화에 관해 서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절대평가를 하되, 해당 학생의 성취도를 점수화하기보다는 세부적인 변화와 학생이 직접 탐구하여 알게 된 것에 대해 기록하는 방식이기를 바란다. 전체에서 해당 학생의 수준이 얼만큼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반문을 한다면, 애초에 절대평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답변을 하고 싶다.
이렇게 평가가 바뀌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귀찮고 힘든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런 만큼 학습의 양을 줄이고 질을 높여서, 욱여넣는 식의 공부가 아니라 자신이 뭘 배웠고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충분히 반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학이나 직장에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공부의 양과 수준이 매우 높아야 할 수 있다. 그런 꿈을 가진 학생은 그렇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어떠한 집단에서 소위 말하는 우등생에게 1등급이라는 타이틀을 주기 위해, 대다수가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며 바닥과 중간을 깔아주는 방식의 평가와 학습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눈에 띄게 주체적으로 된 아이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올해는 아이들의 성장을 잘 관찰하지 못했다. 12개나 되는 곡을 직접 만들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 있는 수업 시간에도 뮤지컬 강사 선생님에게 안무와 연출을 맡겨두고 한 구석에서 오선지에 얼굴을 묻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긍정적인 변화, 특히 에너지의 상승이 많이 느껴졌다. 매우 착하고 순하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창의성을 발하지 못했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눈에 띄게 생동감이 늘었고 수업이나 다른 교육활동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