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소년단 출신 오영수의 동요 「병아리」- 오영수는 언양출신 문학소년 중에 성인이 되어서 단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1927.05.25.).
동아일보
1927년 5월 25일 언양소년단의 오영수의 '병아리'가 실렸다.
귀엽고도 사랑스런/ 우리집의 병아리는/ 삐욕삐욕 소래하며/ 어미밋흘 따름니다/ 심술구즌 소리개가/ 삐-호홀 소래치며/ 무서운 그 고양이가/ 양옹양옹 소래치면/ 병아리들 감짝놀나/ 어머니의 나래밋헤/ 못들엇가 야단이요
1928년 1월 1일 언양소년단의 박복순(朴福順)의 동시 '눈'이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박복순(1914년생)은 언양공보 14회(1929.3) 출신으로, 부친은 이동개의 양부였다. 이동개는 언양소년단 간부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눈이 옴니다/ 저것이 모다/ 사탕이 라면/ 작히나 졸까// 마당의 눈은/ 옵바의 눈이고/ 들판의 눈은 압바의 눈이고/ 뚝위의 눈은/ 내눈이 란다
1927년 이후 언양지역 소년소녀들의 문학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되고 투고작으로 게재된 이들 문학소년 중에 오영수만 유일하게 그 후 문학활동을 계속하였다. 오영수는 <조선일보>에 '술자신우리 아버지(1929.11.10.)', '눈마진내닭(1929.12.01.)'과 '뎐신대(1930.01.25.)'을, <동아일보>에 '박꼿아가씨(1929.10.25.)'를 발표했다.
그리고 언양 '오파침(吳波枕)'이란 필명이 오영수라면, <동아일보>에 '내동생(1930.01.19.)', '누나야 대답해라(1930.09.02.)'를, <조선일보>에 '쪼저진바싹(1930.03.14.)', '물주든아가시(1930.03.29.)'를 더 발표했다. 오영수가 오파침이란 필명으로 글을 발표한 이유가 동생 오호근의 '언양격문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20년대 중반 언양의 정인섭과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은 아동문학 황금기 한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1927년 여름 경성에서 온 윤석중과 함께 서덕출 집에서 만나 머물기도 하였다.
울산소년단체의 사회문화운동
1924년 7월 27일 오후 8시 울산청년회 주최로 청년회관에서 현상웅변대회가 열렸다. 연사 16명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소년군으로 불교소년단 권상호의 독창으로 개회되었다. 심사는 박병호, 이시완이 맡았다. 1등은 불교소년단 박태영, 2등 보통교 5년 임인수, 천도교소년단 박용구, 3등은 천도교소년단 김윤봉, 불교소년단 윤영순 차종출이었다.
1924년 8월 17일 울산불교소년단은 임시총회를 열고 당분간 사정으로 사무소를 울산청년회관으로 이전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가한 유학생과 연합해 소년가극회를 8월 26일과 27일 이틀간 공연했다. 1925년 6월 21일 울산불교소년회는 울산청년화관에서 전울산탁구대회를 열었다. 참가비는 개인 40전이었다.
울산읍에 있는 천도교울산소년단에서는 '소년극단(少年劇團)'을 조직하여 1924년 12월 27일 저녁 8시경 언양에서 사회극인 '청년의 개심(改心)'과 종교극 '신생의 날'을 공연하고, 다음날 28일에는 상남면 거리 천도교 교회에서 공연했다.
1925년 7월 16일 울산성우회(蔚山城友會)와 울산소년회의 주최로 현상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가 열렸다. 심사위원은 방정환, 정순철이었다. 동화부문은 1등 '눈어두운 포수' 차종철, 2등 '용감한 소녀' 박영명, 3등 '흉년과 독수리' 서덕봉, '효의 평화' 김아단이었다.
동요부문은 1등 '내곳동모' 조덕희, 2등 '눈먼 닭' 김해성, 3등 '백일홍' 서계봉, '갈대살' 황덕송(황덕수), 등외 '별' 한봉금, '참새노래' 김말돌이었다. 울산에 온 방정환은 언양에도 둘러 언양소년단 조기회 활동을 봤다.
1925년 8월 13일 울산불교소년회 주최로 울산청년회관에서 음악연주회가 열렸다. 8월 20일 저녁 9시 <조선일보> 울산지국 주최, 울산청년회 후원의 울산웅변대회가 있었다. 소년부 1등은 '똑같은 재주' 박영호, 2등 '재미있는 예이야기' 임연수, 청년부 1등 안석주였다.
울산 출신의 서덕출 이외에 울산의 김인원(金仁元)이 1930년 이후 동시 5편을 발표하였다. '우리 닭(조선일보, 1930.11.26.)', '얼음편지(조선일보, 1930.12.7.)', '새벽 반달(조선일보, 1930.12.10.)', '까치야(조선일보, 1931.1.17.)', '허잽이(매일신보, 1934.01.30)'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에 '까치야'는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좁쌀 한 끼 없는 집이라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는 딱한 사연을 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