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 작품
최혜선
뉴욕에 사는 고모님 댁에서 묵었기 때문에 맨해튼에서 체류했다면 보지 못했을 동네 도서관에도 가볼 수 있었다. 도서관의 복도에는 어릴 때부터 바느질을 했다는 퀼터가 만든 패브릭 누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퀼터의 작품을 보며 온전한 천 위에 모양을 아플리케로 붙인 게 아니라 조각조각을 이어서 평면의 그림처럼 연결한 것부터, 이음매가 자를 대고 그어서 그린 듯 연결된 부분, 색깔을 배치한 방식 등을 유심히 살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었을 작품을 보며 그 제작 과정을 그려보는 것은 내 습관이자 즐거움이기도 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을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재구성하다 보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내가 가지 못한 경지에 있는 작업자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 복합적인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때 내가 있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즐기고 있다는 충만감을 느낀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돌아보면 나는 어쩌면 그 작품을 본 것을 잊을 수도 있고 앉아서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도서관의 건물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옷이나 가방을 만들다 조각천이 남았을 때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씨앗들
바느질이라는 취미를 가짐으로써 만드는 경험을 해보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씨앗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느질이라는 취향으로 만들어진 즐거움의 씨앗들이 내가 어딘가에 가서 뭔가를 봤을 때 내 인생이라는 밭에 뿌려진다. 그 밭이 내가 가진 씨앗들이 발아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순간 씨앗은 잭과 콩나무의 이야기속 줄기처럼 맹렬하게 자라나 나의 뇌에 즐거움이라는 불꽃놀이를 터뜨린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생활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억될 만한 이벤트가 별로 없기 때문에 하루 갔나 싶으면 일주일이 지났고 일주일 지났나 싶으면 한 달이 흘러 있고 그렇게 1년도 후딱 지나간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2022년이 입에 익을 만하니 벌써 뜯지 않은 달력이 12월 한 달뿐이라는 사실에 문득 아연해진다. 하지만 바느질을 하면서, 바느질에 대한 글을 쓰면서, 기억될 만한 씨앗들을 제법 뿌려두었구나 생각하니 1년을 보내는 마음이 마냥 허무하지만은 않다.
새로 맞이할 한 해에도 내가 가진 즐거움의 씨앗들이 새로 뜯은 1년과 만나 어떤 추억을 만들어낼지 상상하니, 재미있는 드라마의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처럼 설렌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드라마를 열심히 즐기되 다음에 볼 드라마가 될 씨앗을 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생각해 본다. 취미라는 씨앗을.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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