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창과 호미해녀들의 물질도구로 해녀시위 현장에 들고 나왔다. 왼쪽이 빗창
황의봉
연두망 동산은 제주에서도 해녀 숫자가 가장 많았던 구좌면 세화리 하도리 상도리 해녀들이 집결하기에 편리한 중간지역으로 시위가 벌어졌던 세화오일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동차도로가 바로 옆으로 나 있고, 동산에서 동쪽으로 내려간 지점은 4·3 당시 구좌면 주민 74명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기도 하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오일장을 택해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2차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호미(제주에서는 낫을 호미라 한다. 미역 모자반 감태 등을 떼어내는 도구)와 빗창(바위에 붙은 전복을 떼어내는 도구로 납작한 쇠붙이에 고무줄을 달아 손에 쥔다)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 보따리를 메고 세화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에서 모여든 해녀들과 합세, 집회를 열고 해녀조합에 대한 성토를 한 뒤 제주읍을 향해 행진에 나섰다. 시위행렬이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면장이 나서서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고, 오후 5시경 일단 해산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구좌·성산의 해녀들이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는 등 해녀조합에 대한 반발 분위기가 확산해갔다. 마침 다음 장날인 1월 12일 새로 부임한 도사(島司·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田口禎熹)가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할 것이라는 소식들 듣고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시흥리 등의 해녀들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12일 장날이 되자 3차 시위가 벌어졌다. 세화 경찰관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외치면서 세화장으로 향했다. 이날 낮기온은 섭씨 7.9도였으나 바람이 초속 8미터가 넘어 매서운 겨울날씨였다.
시위대는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투쟁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했다. 이때 마침 제주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시위대 뒤로 달려오다가 놀라서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차를 에워쌌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해녀대표 3인이 경찰관주재소에서 도사와 마주앉아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항일적 성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직접 담판을 벌였다. 결국 도사는 해녀들의 시위에 굴복하여 요구조건을 5일 내 해결하겠다고 약속,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다.
도사와의 합의 이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고 오히려 해녀들과 청년들 체포에 나서자 해녀들은 1월 24일 4차투쟁에 나섰다. 역시 세화 오일장날이었고 400∼500명이 모였다. 팔과 팔을 서로 끼고 4열 종대를 지어 나아갔다. 경찰은 하늘로 총을 쏘면서 해산을 시도했다. 이때 경찰은 해녀들이 입은 흰저고리에 붉은 도장을 찍어 표시를 한 뒤 해녀들이 흩어지자 이를 근거로 곳곳에서 연행에 나섰다. 마지막 대규모 시위였다.
일본어민 진출로 생존권 위협받게 된 해녀들
이 무렵 전남 목포에서 무장경찰 40여 명이 급파되기도 했다. 26일에는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고, 27일에는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 해산됨으로써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되었다(해녀투쟁 과정은 박찬식 박사의 강의내용 인용).
<조선일보>(1932.1.24)는 "제주읍 동문 외에는 경관을 배치해 통행인 주소, 성명을 조사하므로 일반은 통행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 경계는 전 제주도적으로 삼엄하여 마치 계엄령이 내린 듯하다"고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해녀들이 이같은 투쟁을 벌이게 된 데에는 그들의 비참한 실태와 함께 해녀조합의 어용화로 인한 각종 수탈적 행위가 만연한 데 따른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1876년 개항으로 제주 해녀들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시대의 출륙금지에서 벗어나 타지역으로 나갈 수 있게 된 반면, 일본어민의 진출로 제주 어장이 황폐화함에 따라 채취량이 감소해 생존권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에 제주 해녀들은 살 길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북부는 물론, 일본과 중국의 다렌(大連) 칭다오(靑島) 나아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했다. 1930년대는 그 수가 40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해녀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한반도 남해안 지역. 값비싼 해조류가 풍부했다. 1916년 일본으로 수출한 우뭇가사리 가격은 미역의 66배, 1930년대에는 1033배에 달했다고 한다(박찬식 박사).
그러나 해녀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해당 지역 어민들과의 분쟁으로 시달렸을 뿐 아니라 채취한 해조류를 객주(客主·위탁매매인)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객주들은 무지한 해녀들을 상대로 채취량과 가격을 속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객주들의 자금은 대개 일본 상인들이 대주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은 객주와 결탁, 해녀들의 채취물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이 세운 해조회사에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