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어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
이창학씨 제공
[관련기사]
[인터뷰①]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내게 트라우마였어요"
[인터뷰③]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요? 김광석이요"
* 맨 아래 볼륨을 높이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래가 나옵니다.
- 책에 수록된 곡들이 어떤 대상을 노래했나 봤더니 4.3 제주항쟁,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망월동 묘역, 김세진-이재호 열사, 박종철 열사, 조성만 열사, 가수 김광석, 노무현 전 대통령, 세월호, 고 김용균 등이었어요. 저는 이 곡들이 대부분 '진혼곡' 같더라구요.
"좀 그래요. 책 추천사를 써준 후배 원동욱이 예전에 나를 '무당'이라고 했어요. 어떻게 하다 그런 얘기가 나왔냐 하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라는 노래로 내가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제 노래 같지 않았어요. 내가 24살에 썼다고 믿어지지가 않은 거죠. 최근에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클래시컬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니 수준이 되게 높은 거예요. 음악도 전공하지 않았던 내가 24살에 쓴 거 같지가 않았어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한땀한땀 열과 성의를 들여 하나하나 허투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저런 가사를 저런 멜로디를 내가 썼을까 싶어요. 그래서 내 노래 같지 않다고 얘기하니까 동욱이가 '그러니까 형은 신내림을 받은 거다, 형은 무당이었다'고 했어요.
사람이 순간적으로 심하게 격해지잖아요. 아마 그런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가는 거겠죠? 그런 슬픔이 있으면 그걸 잘 견디지 못하는 거죠. 박종철 추모곡('타인의 고통')은 쓸 생각이 없었는데 써 달고 해서 한 거였고, 한라산도 써 달라고 해서 한 거였고, 조상만 열사('그대 진달래 되누나')는 ('벗이여 해망이 온다'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 있으면서 그 사건을 들었을 때 가슴이 막혀서 미어져서 쓴 건데, 그게 '그대 진달래 되누나'였어요."
"음악적으로 괜찮은 노래 나온 건 '새벽' 활동할 때"
- 저는 그 노래들 속에는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 역사들'을 망각하면 안된다는 의도가 보이지 않게 있지 않나 싶어요.
"그것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었어요. 내가 당위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제 노래들에는 전혀 없어요. 당위가 있는 건 '부활하는 산하' 정도죠. '부활하는 산하'는 공연주제곡으로 쓰려고 한 거고, 뭐도 모르고 처음 쓴 거였기 때문에 아예 의도적으로 쓴 거였어요. 첫 노래가 '사월 그 가슴 위로'였는데 그것도 의도적이었죠. 그거 빼고는 대개는 개인적이었어요. '한라산'의 경우 후배들이 4.3이 금기였으니 그 금기를 풀고 재조명하자는 1987년 당시의 분위기를 띄우고자 내게 부탁했죠. 하지만 부탁한 것만 가지고는 노래를 못쓰니까, 쓰게 된 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어요.
한라산'에 '조국통일만세'가 나오지만 이념적인 거는 하나도 없어요. 단지 슬프다, 억울하다, 왜 저런 떼죽음을 당해야 해? 이런 거였어요. '조국통일만세'는 그 사람들이 당연히 분단되는 나라를 싫어하니까 나온 거죠. '조국통일만세'는 그들이 외친 구호들이긴 하지만 그게 심각한 얘기냐? 하는 얘기였던 거예요. 나한테 4.3은 죽어간 사람들에게 느꼈던 억울함, 눈물나는 아픔 이런 거였어요."
-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전체로, 역사로 나아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노래는 부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듣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죠. 그것은 그쪽의 자유영역이니까요. 거기서 작사가나 작곡자의 의도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내게는 아마 열 손가락 중 깨물면 가장 아프게 느낄 만큼 아끼는 자식 같은 노래"가 '사랑하는 이여'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요?
"물론 제 노래가 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제 노래를 평론하는 평론가라면 음악적으로는 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적으로 괜찮은 노래가 나온 시기가 '새벽'에서 활동할 때,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쓸 때부터에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귀례이야기', '한라산' 세 곡을 연이어 썼어요. 2-3개월, 6개월 간격으로요. 그때 노래들이 괜찮아요.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여러 노래를 쓰긴 했지만 저에게는 별로예요.
1993년~1995년 이때의 노래들이 '망월동, 1993년 여름', '사랑이는 이여', '하늘'이거든요. 장르가 다 다른데 음악적으로만 보면 다 괜찮아요. 이때는 '새벽'에서 활동할 때였고, 전두환 정권이었고, 졸업했는데 직업도 없고, 혁명운동하겠다고 노래운동하겠다고 살면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부모님이랑 맨날 싸우고, 그럼에도 내 의지를 다져야 했던 때에요. 문승현 선배 등 내가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가 되게 힘들었을 때에요. 음악적으로도 이런 것을 잘 받아들이고 표현도 잘하고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표현하고, 그러면서 커 나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다가 소비에트가 망하고, 사회주의 이념이 붕괴하면서 믿을 데도 없고,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 빚보증에 개인 파산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당장 먹고 살아야 하고, 애들도 둘이어서 힘들었어요. 뉴욕에서 '우리문화찾기회'를 하면서 여러 뮤지션들을 만났어요. 서울대 작곡가 84학번인 신동일, 그 친구가 그 당시에 뉴욕에 와서 석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랑 음악작업을 몇 번 같이 했어요. 내가 작사하면 신동일이 작곡해서 노래를 만들어 공연에서 같이 불러보곤 했죠. 근데 음악적으로 굉장히 신선하더라구요. 내가 김민기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또 한사람이 '신현중'이라고, 옛날 노찾사를 했던 성균관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당시 보스턴의 버클리대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자기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공연에서 반주를 하게 됐어요. 재즈피아니스트에요. 내 노래를 막 재즈화성으로, 블루스 화성으로 연주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블루스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것에 자극받아서 집에서 혼자 피아노로 화성을 연습해보곤 했어요. 이렇게 음악적 자극들이 있었고, 배울 것들이 있었어요.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등이 하나님이 나에게 시험을 줘서 마음을 강퍅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할까, 교만하지 않게, 하나의 고정적인 관념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오히려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때 음악적으로 다른 기법으로 해볼 수 있었던 노래들이 그 당시 노래들이에요. '사랑이여'가 그 당시 제 절절한 심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거였어요. 화성이 왔다갔다 하고, 중간에 클래시컬하게 변화도 줘서 만족스러웠죠. 내 잔잔한 얘기를, 솔직한 얘기를 충분하게 담아준 것 같고, 음악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고, 가사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내 팍팍했던 심정들을, 사회주의 붕괴 등으로 머리가 혼란스럽고 유학온 사람으로서 한국에 있는 여러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들, 이런 얘기들을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내가 노래를 만들고 선택했어요. 그 소통할 상대방에게 발표되고 전달된 적이 없어서 얼마나 소통이 됐는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소통하기 위해 충분하게 표현을 잘 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김민기형 노래가 교과서였어요, 다른 교과서가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