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신당역 10번출구 앞에서 열린 피해노동자 추모 문화제10월 26일 신당역 10번출구 앞에서 열린 피해노동자 추모 문화제
반올림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참 많이 죽습니다. 매년 2000명이 넘습니다. 병들고, 다치는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매년 1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산재를 당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병들고 다친 사람 중에 산재를 신청하거나 인정받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곳 신당역에서 살해된 노동자는 젠더폭력으로 일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젠더폭력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더욱 많습니다. 그리고 젠더불평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의 건강문제와 관련돼 있습니다.
반올림 활동이 여러 성과를 냈지만, 돌아보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였고 가장 희생이 컸던 여성노동자의 관점에서 반도체 직업병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반도체 직업병은 백혈병처럼 사람이 죽거나 힘든 치료를 통해서도 잘 회복되지 않는 암질환 위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반도체 작업환경이 직업성암만 일으키는 건 아닙니다.
반도체 산업이 탄생했던 미국에서 직업병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백혈병이 아니라 생식독성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조사를 통해 IBM 노동자들의 유산비율이 3배 가까이 높다는 것이 확인됐고, 미국에서는 이 생식독성 물질 에틸렌글리콜에테르의 사용이 중단됐습니다. 이게 1995년의 일이었는데요. 한국에서는 2009년 조사에서 이 물질이 삼성과 하이닉스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미국에서 금지된 이후에도 15년이나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죠.
국제적으로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었던 문제를 삼성과 하이닉스가 모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삼성과 하이닉스(당시 현대전자)는 IBM과 대규모 납품계약까지 했으니까요. 아마 이 물질이 대체물질보다 3배나 싸고, 성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모른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물질보다 더 해로운 물질도 많았으니, 특별할 게 없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도 미국과 똑같이 불임과 유산같은 생식독성 문제를 많이 겪었습니다. 생리불순 같은 더 흔한 문제는 그저 당연한 일일뿐 아예 문제로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직업성 암에 비해 많이 발생했지만, 산재를 통해 공식 인정된 건 단 1건에 불과합니다. 문제가 생긴 건 미국과 같았지만,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