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사 묘역.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의 가묘,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묘소. 찾아간 10일은 이봉창 의사의 서거 90주기였다.
서부원
그런데도 묘가 조성된 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효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거칠게 말해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욕보이는 짓이다. 역사적 위상을 공인받아 1989년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면, 마땅히 이름부터 손봐야 했다. '공원' 앞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참고로, 효창공원은 18세기 말 조선 정조 재위 때 어린 나이에 요절한 문효세자의 무덤을 조성하며 효창원이라는 이름을 처음 얻었다. 이후 문효세자의 친모인 의빈 성씨 등이 차례로 모셔지며 묘역의 규모가 커졌다. '원(園)'은 세자와 세자비, 후궁 등을 모신 무덤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에 효창원은 일본군의 숙영지로 사용됐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주둔했던 용산 지역과 인접한 데다, 묘역이 넓고 숲이 울창해 낙점한 것이다. 이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의 전몰자를 기리는 충혼탑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조선 왕실의 무덤을 서울 외곽으로 이장한 뒤 공원으로 조성했다.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이듬해 윤봉길 등 세 분의 의사를 봉환해 효창공원 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김구 자신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져 자신이 모신 세 분의 의사 곁에 묻혔다. 나라 안에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정비되기 전인 당시 효창공원은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성소가 된 것이다.
'성소'에서 '동네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