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방직 대구공장 모습(자료사진)
김종철
그 때 누군가가 금성방직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알려줬다. 경력을 쌓고 다른 곳으로 옮기면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금성방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금성방직에 들어가서도 처음에는 일이 서툴러서 욕을 많이 먹었다. 책임자는 기계를 갖다 줘도 기계를 제대로 돌릴지 못한다고 구박했다. 그래도 2~3년의 시간이 지나자 꽤 일에 능숙해졌고 나는 실 잇는 작업 단계 다음으로 실 뽑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근무는 보통 3교대로 진행되었는데 아침 6시에서 오후 2시 조, 오후 2시에서 밤 10시조, 밤 10시에서 새벽 6시 조로 나뉘었다. 항상 잠자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공장의 기계는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야만 했다.
금성방직에서 일이 익숙해지니 금성방직이 있는 안양 생활에도 정이 들었다. 제주도 사람 여럿이 모여서 사니 외롭지 않았고 매월 정기적으로 월급도 따박따박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잔업을 하고 야간 근무를 많이 해도 노란봉투로 받은 월급은 하숙비 내고 생활비로 사용하다보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돈을 저축하려고 했다.
동네 동갑내기 의옥과의 만남
나와 같이 생활하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와 있던 고향 사람인 재수, 종수, 상균이 삼촌 등과 주말이면 만나서 자주 여기 저기 놀러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은 고향사람들 만나는 자리에 나중에 남편이 된 의옥이 나와 있었다.
나와 의옥은 어릴 때 한 동네에서 자라긴 했지만 같이 어울려 놀았던 친구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의옥은 제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고 졸업할 형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회의원 출마도 하고 일본 거류민단 대표도 맡았던 먼 친척 동네어른인 김진근 삼촌이 도움을 주어서, 그는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의옥과 김진근 삼촌의 아들인 용휴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 나란히 살았던 죽마고우였는데 당시 중앙대 학생이었던 용휴는 제주에 계셨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흑석동에 살고 있었다. 의옥은 용휴를 만나러 서울로 오기도 했었고 당시 큰 교통사고를 당한 동생이 서울에서 대수술을 몇 번 받아야 했기에, 그 때문에 자주 서울을 드나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옥이 서울로 자주 드나들면서 고향사람들 만나는 자리에도 나오는 기회가 많아졌고 나와도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의옥이 먼저 따로 만나자고 데이트를 신청하였다.
의옥의 집안은 동네에서도 복잡하기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4.3때 형이 죽었고 다섯 명의 오촌 형제들이 몰살당했다.
당시 의옥의 아버지는 4.3 당시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아, 동네 사람들 손을 빌어서 일가친척들의 시신을 거두어야 했다. 시신을 거둔 후에도 생사를 달리한 친족들의 제사를 모두 맡아 지내야 했으니 그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이라면 누가 그와 선뜻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복잡한 집안 사정 외에도, 동네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오빠들과만 어울려 놀았던 나에게 동갑인 의옥은 어리게만 느껴졌다.
그런 여러 가지 점들 때문에 나는 의옥의 교제 신청이 그리 달갑지 않았고 결국 거절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의옥이 술에 만취해서 괴로워한다는 소식을 자꾸 전해주는 것이었다. 마음 약한 나는 동정심도 생기고 '그 사람이 나에게 진정으로 마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결국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하루는 그를 만나서 말했다.
"나는 빚도 많고 해서, 결혼한 후에도 1년 정도는 지금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생각해보겠다."
의옥은 나의 조건을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나는 그의 청혼을 승낙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경찰서에 갇힌 의옥
공장을 더 다니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기에 나는 휴가를 내고 제주에 내려갔다. 하지만 목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기로 한 날 파도가 너무 세서 배를 탈 수 없었고 결국 배가 뜨기를 기다리며 1주일이나 목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간신히 파도가 잠잠해져 배를 타고 제주로 가기로 한 날, 의옥은 나를 마중하러 동네 친구, 형들과 함께 부두로 왔다.
다방에 앉아서 배의 도착을 기다리던 중 다소 뻣뻣한 성질을 가진 이가 다방에 있던 다른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러자 다방 주인이 바로 신고를 했고 결국 의옥 일행까지 부두와 멀지 않은 경찰서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사정도 모르고 어두운 밤에 배에서 내린 나는 마중 나올 이를 기다리며 한참을 부둣가에서 서성였다. 11월 말이어서 캄캄한 어둠 속 거센 바람과 함께 파고드는 한기는 더욱 매서웠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혼자 집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결국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의옥의 집안은 결혼 날짜가 코앞인데 신랑이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어서 애만 동동 태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동네에서 가장 명망가인 김진근 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의옥은 간신히 결혼식 전에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김진근 삼촌은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는데 당시 경쟁 상대였던 고담룡에게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다. 당시 제주 오도롱(마을)은 똘똘 뭉쳐서 김진근 삼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게 힘썼는데 동네에서 세 사람이 고담룡을 찍었다고 한다. 모두 고씨 집안이었는데 투표 전부터 그들은 고담룡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제5대 민의원 선거는 제주시 6명, 북제주군 6명, 남제주군 7명 모두 19명이 입후보하여 6.2 대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제주시선거구 민주당 고담용, 북제주군선거구 민주당 홍문중(洪文中), 남제주군선거구 한국사회당 김성숙(金成淑)이 각각 당선되었다. 선거 후인 10월 28일 제주시선거구에서 당선된 고담용은 선거법위반으로 서울고법에서 준기소명령을 받았다. 서울고법은' 고담용 후보가 선거 기간 동안 김진근(金晋根) 후보를 조총련계의 좌익분자라고 한 것이 당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 된다'고 하였는데, 고후보와 김후보와의 표 차이는 771표였다. 이 사건은 법원에 계류 중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여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결말이 나지 않았다. ('제주 오현고 50년사' 7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