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02월 22일 황성신문에 실린 <함일학교 취지>. 기존의 유지의숙(有志義塾)이란 이름을 함일학교(咸一學校)로 바꾼다는 사실과 함께 장차 나라에 쓰일 인재를 양성하겠노라는 포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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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의 함일학교 입학은 그가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함일학교는 단순히 신식 학문만을 지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일학교 출신들 중에는 훗날 우리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교장이었던 김영학(金永學)은 1920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외교부장으로 활약했고, 북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서일(徐一)·안무(安武)·현천묵(玄天默) 등도 모두 함일학교 출신이었다.
문일민은 16세가 되는 1909년까지 함일학교에서 수학한 것으로 이력서에 기술한 바 있는데, 이처럼 민족 교육을 실시한 함일학교를 다니며 소년 문일민은 차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다만 함일학교는 함북에 있던 학교로, 평안도 지방에 거주하던 문일민이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함경도까지 건너가서 수학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문일민의 함일학교 수학 여부에 대해서는 함일학교 재학생 명부 등 추가적인 사료 발굴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다. 그러나 소년 문일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일이 더 급했다.
문일민은 평양 일대에서 잡화상·물산 위탁판매상으로 활동하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그는 하루 종일 장사를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밤에는 야학 활동을 병행하는 등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실천했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 없이 흘러가고 마침내 1919년이 밝았다. 문일민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 3부에서 계속 -
[참고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대한민국공훈사발간위원회, 1991.
2) 김형목, 「함경북도 鏡城의 私立咸一學校維持契」, 『한국독립운동사연구』5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3)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島山安昌浩全集』13,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4) 이동언, 「만주 독립군지도자를 길러낸 함일학교」, 『월간 독립기념관』 287호, 2012.
5) 흥사단,「제239단우 文逸民」, 19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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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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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동경했던 소년 문일민, 함일학교에 입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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