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썰어 놓은 누른 국수
김혜원
리드미컬하게 국수를 밀고 칼로 썰어 고르게 펼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는 엄마를 보며 신기한 기술자 같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어린 시절의 나는 밀가루 음식이 싫어서 국수 말고 밥을 달라며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엄마, 내는 국수 먹기 싫다, 아래도 먹었잖아. 밥도(줘), 나는 김치하고 밥 묵을 거다."
"누른 국수가 얼마나 구수하고 맛있노! 국수 싫으면 국물에다가 밥 말아가 무라(먹어라) 알겠재?"
엄마 표현대로 비할 바 없이 구수하고 맛있는 그것도 너무 자주 먹으니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최애 음식을 나의 투정이 이길리 만무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성정의 엄마였지만 대부분의 그 시절 어머니들이 그랬듯 당신의 남편, 가장의 말을 최우선시했기에 말이다.
누른 국수가 먹기 싫어 칭얼대는 나와 동생을 위해 엄마는 국수를 썰고 남은 꽁다리를 연탄 화덕에 구워주곤 하셨는데, 이게 또 별미이긴 했다. 그냥 밀가루가 아닌, 콩가루가 섞인 반죽으로 구워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소하고 바싹하게 구워진 꽁다리를 하나씩을 들고, 어떻게든 국수를 먹지 않으려고 뻗대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금세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어쩌면 그렇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누른 국수를 만들던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던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기에 말이다. 한 그릇의 국수로 식구들과 객식구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까지 배불리 먹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즐거워했던 내 부모님의 부부로서의 행복이 그렇게나 짧았다는 걸, 왜 나는 머리가 굵어지고서야 느끼게 된 것일까?
시간이 제법 걸리는 누른 국수와 거기에 어울리는 겉절이를 때마다 만들면서도 한 마디 불평을 내놓지 않던 엄마의 마음이, 당신의 남편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기에,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아쉬워 절로 한숨이 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국수판과 밀대는 좀처럼 광에서 나오질 못했다. 국수를 엄청나게 좋아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도 했거니와, 어쩌다 한 번 국수라도 밀라치면,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서 왠지 가족들은 가장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한동안 우리 집에서 '누른 국수'는 금기의 음식이기도 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밴 한옥에서 이사를 나오던 날, 엄마는 물끄러미 그 국수판과 밀대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고 삼남매 몰래 회한에 찬 얼굴로 하늘을 한참 바라봤던 거 같기도 하다.
언젠가 엄마를 모시고 누른 국수로 유명한 맛집엘 들른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국수는 당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끓여먹는 것이라 여기던 엄마로만 생각했는데, 후루룩후루룩 어찌나 잘도 넘기시던지 보는 내내 마음이 흐뭇했었다.
"엄마, 맛있재? 엄마가 한 것보다는 좀 덜해도, 그쟈?"
"아이고 뭐라 하노, 국수는 넘(남)이 끼리(끓여) 주는 기 젤로 맛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누른 국수 맛집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제법 길다.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엄마의 손맛이 제대로 담긴 집이라 그런가 싶다. 알싸한 양념장과 매일 버무려지는 겉절이 김치를 생각하니 가을이면 항상 집을 나가곤 하는 내 입맛도 돌아올 것만 같다.
더불어 아직은 이렇게 음식으로 개인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맛집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비록 엄마는 이제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다시 돌아온 가을은 늘 그윽하고, 바야흐로 누른 국수는 제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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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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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우리집 '금기 음식', 찬바람 불면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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