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OB베어 자리2022년 9월 현재, 다른 간판을 단 가게가 영업 중인 을지OB베어 자리.
이영천
2년 남짓 골목을 청소하며 인쇄 노동자들과 얼굴을 익힌다. 그들과 동질성을 보여주면서 눈높이를 맞춰간 것이다. 인쇄 노동자 발길이 이어졌다. 납기를 맞추느라 밤샘하고 퇴근 전 가볍게 생맥주와 노가리로 피로를 씻어낸다.
영업시간 또한 밤 10시를 넘기지 않았다. 다음날 근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다. 상생이 무엇인지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이어가며 단골이 생겨났다. 20년 단골은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이 회자했다. 그런 노력과 마음이 2대를 이어 42년 한자리를 지키게 만든 힘이었다.
1989년 을지OB베어 맞은 편에 '뮌헨호프'가 문을 연다. 개업 전, 을지OB베어에 가게를 열어도 되겠냐는 양해를 구한다. 골목은 이런 끈끈한 미덕을 가진 동질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이 골목이 유명하게 된 가장 근저에 깔린 정신은 배려와 동류의식, 주변 영세한 인쇄소와 공장, 상점과 공생하려는 마음이었다.
생맥주 열풍을 타고 골목에 그만그만한 가게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을지OB베어와 뮌헨호프의 존재는 여러 생맥주 가게를 이 골목으로 끌어들인 힘이었다. 서울 중구청은 옥외 영업이 가능하도록 관련 조례까지 만들어 가며, 길에서 좌판을 벌여 영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노가리와 생맥주 골목은 입소문을 타고 대낮은 물론 늦은 밤까지 환히 불 밝힐 수 있었다.
다툼과 철거
2022년 4월 21일 새벽. 을지OB베어는 법원의 강제집행에 철거되고 만다. 가게를 비워달라는 소송에서 패소한 후 시도된 마지막 기습 철거였다. 2배의 임차료를 내겠다는 제안도, 새 임차인이 제시한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도 거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