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사진서재 책꼿이에서 발견한 김성동의 젊은 날 사진
고석배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세 식구는 빨갱이 가족이라고 스무 번 정도 도망치듯 이사하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기관원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만다라>를 출간하고 나서는 불교계에서 죽이겠다고 협박해 20년간 피해 다녀야 했다.
실제 살해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동 작가는 생전에 자신은 '도망치는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던 충주에서 그를 가까이 지켰던 후배, 최용탁 작가는 슬픔이 더 크다. 김성동 작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충주로 이사 왔다. 최용탁 작가는 말한다.
"6월에 지역 서점에서 강의하고 뒤풀이로 오랜만에 약주 한잔을 걸치셨습니다. 그날따라 무척 기분 좋아 보이셨어요. 그날 이후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살은 점점 빠지는데 그러면서도 통증을 참아내며 꼿꼿이 앉아 마지막 원고 교정을 하셨어요."
미륵뫼를 찾아서
유고집이 된 그의 마지막 책은 세 권이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복간이고 '(가칭)미륵 세상 꿈나라'는 상권에 이어 하권을 완성했으며 '미륵뫼를 찾아서'는 신간이다. 작가회의 회보 편집장을 하며 김성동 작가와 인연을 맺은 이장곤 시인이 출판을 맡았다.
문인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도종환 시인, 안재성 소설가 등 150여 명의 작가가 찾아왔다. 김사인 시인이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다. "가없는 그리움으로 살았던 분"이라는 추도사에 모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땅 한 평 없어 허공에 뿌려질 뻔한 그를 충주의 지인이 마지막 머물 곳을 마련했다. 행여나 그를 잊지 못해 찾아올 독자들을 위해서였다. 47년생 유일한 벗으로 양평에서부터 허물없이 함께한 윤형로씨는 해마다 추모제를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생겨 마음이 놓인다 했다. 그의 묘가 있는 '충주시 산척면 석천리 산62-1'은 미륵뫼가 됐다.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그의 책 '민들레꽃반지'에 해설을 쓴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에 그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고. '기적 같이 살아온' 그가 떠났다. '병 속의 새'도 마침내 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떠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병 속의 새'는 김성동 자신이었으며,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반도의 민중이라는 것을.
결국 그는 이승에서 병을 깨지 못하고 저승에서야 비로소 분단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저승에서는 훨훨 자유의 몸이 되어 한 살 때 만나고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 지상에서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실컷 부르고, "아버지! 아들아!" 얼싸안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길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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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직장은 잡지사 였으나 의도된 기사를 강요해 포기. 방송작가와 방송프로듀서를 천직으로 알다 돈 벌어보겠다고 게임 사업함. 외국에서 한국어교사를 하다 돌아와 세계시민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문화교육 전공. 시니어와 돌봄의 사회문제에 관심 많음. 가끔 시를 쓰나 발표할 생각은 없음. 좋은 기자가 되겠다던 첫 직장에서의 꿈을 이루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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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성동... 기적처럼 살다 날아간 '병 속에 갇힌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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