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의 태화전베트남 황궁의 정전인 태화전은 중국 자금성의 정전과 이름이 같다. 베트남 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건물이 낮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다.
운민
프랑스는 자국의 신부를 처형했다는 것을 명분을 삼아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한다. 청나라의 개입도 청불전쟁로 무마시키면서 프랑스는 사이공(호찌민)을 시작으로 베트남의 남과 북쪽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는다. 결국 1884년 2차 후에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들어가면서 수십 년간 이어진 프랑스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고 만다.
우리와 차이점이라 하면 왕조가 없어진 조선과 달리 응우옌 왕조는 해방 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단지 실권은 전부 프랑스에게 넘어간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흐엉강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누어지는 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많은 파괴를 겪었지만 하노이에서 볼 수 없었던 궁궐을 마주하게 된다.
후에의 궁궐은 시타델 또는 호앙탄(황성)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다른 왕궁들처럼 성벽과 해자를 건너야 그 구역에 닿을 수 있다.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 604m, 동서 620m로 우리의 경복궁보다는 조금 작지만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만큼 건물 이곳저곳에서 그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궁의 정문인 오문, 정전인 태화전 등 베이징의 자금성 전각들과 명칭이 같은데 이를 통해 베트남 역시 황제국으로서 위엄을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제 오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왕궁으로 들어간다.
이 위풍당당한 오문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앞으로 펼쳐질 궁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중앙에는 황제의 상징인 황색 기와를 덮고 있고, 2층으로 된 누각에는 100개에 달하는 철목들이 떠받치고 있으며, 용마루와 잡상 자리에 수많은 봉황상들을 설치했다.
정문을 지나 정전 구역인 태화전에 닿으면 화려한 외관과 달리 건물의 높이가 다소 낮아 보이는데 이는 베트남의 날씨와 전통건축을 고려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좌를 중심으로 하는 내부 공간은 우리의 건물보다 널찍하다. 태화전의 동편과 서편에는 태묘와 종묘 등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뒤로 펼쳐진 내정 구역의 건물 대부분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전투 후반부에는 북, 남 베트남 군대가 본격적인 격돌을 펼치며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해 150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에선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순차적으로 복원작업을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갈길이 요원하다. 그러나 흐엉강을 따라 산재해 있는 왕릉들은 각 황제가 심혈을 기울였을 만큼 화려하고 보존상태가 말끔하다. 다음화에선 응우옌 왕조의 왕릉을 따라 떠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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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팟케스트 <여기저기거기>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obs라디오<굿모닝obs>고정출연, 경기별곡 시리즈 3권, 인조이홍콩의 저자입니다.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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