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색을 맞춰 상을 차려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이렇게 해서 한 상을 제대로 차려 먹어야 한다고 여전히 생각했다.
최은경
1만 5000원. 내가 네 시간 알바를 해서 버는 돈이 5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거기에 오후에 글을 쓰고, 혹은 수업을 하고, 그래봐야 많은 부분이 빚을 갚는데 들어가고 나면........ 머릿 속에 주판알을 튕기다 보니, 이제 내가 '갈비탕이나' 사먹는 처지가 아니라는 '실감'이 다가왔다.
거창하게 '독립' 운운했는데, '독립'이란 무얼까? 얼마전 자상하던 아들을 '독립'시킨 지인이 아들을 시집 보냈다며 농반진반 말을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독립' 하는 시대이다. 그럴 때 '독립'이란 '집'을 떠나, 홀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호기롭게 알바 자리를 구했지만, 그때까지도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내가 갚아야 할 빚을 갚을 정도의 돈을 버는 데 전전긍긍했다. '주부'로 산다는 건 나와 가족을 한 몸처럼 느끼며 살아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늘 나보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랬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반스턴트'라고 하면서도, 일을 하며 식구들의 끼니를 풍성하게 차려내는 걸 내 '미덕'이라 여겼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집을 떠나고, 더는 집밥에 연연하지 않는 시절이 되자, 그저 내가 차린 밥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없음만이 서운했다.
그리고 굳이 국이나 찌개가 없어도 된다는 남편에게 늘 형식을 갖춰 끼니를 차려내는 걸 내 남은 의무라며 챙겼다. 생수를 배달해 먹는 시절에 나는 고혈압인 남편에게 좋은 물과 나와 아이들이 먹을 물을 따로 끓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우리집 물맛이 좋지', 이러는 아이들의 말 한 마디에 자부심을 느꼈다.
나만을 위한 밥상
'독립'은 바로 그런 시절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나는 이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밥상'을 차리면 되는 시절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처음엔 깨닫지 못했다.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나는 가족을 위해 상을 차리던 '주부' 모드였다.
구색을 맞춰 상을 차려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이렇게 해서 한 상을 제대로 차려 먹어야 한다고 여전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차려 먹으려면 식비가 많이 들었다. 제대로 된 한 상과 돈을 아껴야 한다는 딜레마 사이에서 쩔쩔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 혼자 점심을 챙기고, 다시 저녁을 차려 먹는 일이 익숙치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던 것에 길들여졌던 나는 나를 위한 '밥상'이 어색했다.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얼 먹고 싶은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차릴 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 남편을 위해 차릴 때는 남편이 좋아하는 거 위주로 상을 차려왔던 나였기에 나를 위한 한 끼가 막막했다. 홀로 밥상을 차리다 보니 새삼 홀로 지내는 이들이 떠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