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양안치재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퇴각하던 원주 경찰은 이곳에서 다시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박기철
학살의 시작, 대통령의 특명
횡성과 원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비롯해 6사단의 만행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6사단 헌병대 4과장이자 일등상사로 근무했던 김만식씨의 증언 덕분이었다.
2007년 7월 4일, 김만식씨가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8일에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최초로 횡성에서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6사단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학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증언한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직접 횡성 사건의 일부 현장을 지휘했으며, 원주에서는 확인사살까지 진행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당시 군인들의 간접 증언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사건에 참여한 이의 구체적인 증언은 처음이었다.
김만식씨의 증언은 여러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과 정황을 알려 주었다. 우선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학살을 결정한 계기와 시점에 대한 것이다.
그동안 보도연맹원 학살을 합리화하려는 측의 주장 중 하나는 학살이 서울 함락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울은 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에 함락된다. 그러자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게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났고, 이런 현상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지 않도록 어쩔 수 없이 전국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전까지 최초의 보도연맹원 학살은 7월 1일 이천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김만식씨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에 첫 학살이 일어났고, 이는 서울 함락 이전 전쟁이 터지자마자 이미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에 나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은 유사시 보도연맹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학살을 언제 누가 명령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김만식씨는 횡성 사건 발생 하루 전인 6월 27일 헌병대 사령부로부터 '대통령 특명'이라는 무전을 직접 받았다고 한다. 그 특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 명령에 불복하는 부하를 처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했던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2000년 제주 인권회의에서 '분대장 이상 계급에는 즉결권이 있었다'는 증언과 일치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정황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증언이었다.
그의 증언은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시점을 앞당기면서 이전의 주장과 사실을 재검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학살이 누구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증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