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가운데) 영국 국왕과 왕실 가족들이 19일(현지시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운구 행렬을 따르고 있다.
연합뉴스
국왕으로서 의회와의 관계를 초반에 마무리 지은 찰스 3세는 상주로서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의 관을 웨스트민스터 홀로 안치한 14일 군복을 입고 왕실 근위대와 총포차 위에 놓인 관을 따라 행진했다. 공개 조문 기간인 16일 15분간 관을 지켰다. 19일 장례식 때도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다시 버킹엄궁까지 군복을 입고 왕실 군대,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 군 대표단과 함께 걸었다.
여왕 국장 의례는 대영 제국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생겨났다. 우선 장례 행렬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군대색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국장 때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영국을 다스린 빅토리아 여왕은 군인의 딸로 묻히고 싶어 했다. 군대 행렬로 바꾸고 관 역시 총포차로 옮겼다. 총포차를 말로 끌게 했으나 장례식날 말이 말을 듣지 않아 해군 병사가 끌게 했고 이후 국장의 관은 100여 명의 해군이 손수 끈다.
화려한 대규모 거리 행렬과 공개 조문은 19세기 말부터다. 17~18세기는 왕과 왕족의 죽음을 개인적인 일로 이해해 한밤에 절제된 의식으로 치렀다. 1898년 윌리엄 글래드스톤 총리 국장 때 처음으로 공개 조문을 했다. 3년 후 빅토리아 여왕 때는 공개 조문은 하지 않되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히 치렀다. 1910년 에드워드 7세 국장 때는 공개 조문을 받는다. 이때 사용된 웨스트민스터 홀이 공개 조문 장소로 정착했다.
찰스 3세처럼 직접 관을 지킨 의례는 1936년 조지 5세 국장 때 시작된 것이다. 당시는 왕자만 관을 지켰지만 엘리자베스 2세 국장 때는 공주도 관 지키기에 참여했다. 군 관련 직위를 받은 이들은 군복을 착용해 화려함보다 절제된 엄격함과 국가에 대한 봉사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19세기식 국장 의례에 영국인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공개 조문을 넉넉히 닷새로 잡았지만 조문 행렬이 점점 길어져 마지막 날은 8킬로미터를 기록했다. 하루 전날에는 24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할 정도라 조문 못할 수도 있으니 더 이상 줄을 서지 말라고 공지했다. 마지막 장례 행렬을 보러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추모객들은 꽃을 던졌다.
긴 조문 행렬 속에 공화정을 외치는 목소리는 왜소화되었다. "XX 왕실," "내 왕이 아니다," "누가 그를 선출했나?" 등을 외친 이들이 체포되고 비난받을 만큼 틈이 없었다. 찰스 3세를 향해 "우리는 에너지 고지서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당신의 퍼레이드 비용을 내야 한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왕과 악수하고자 내미는 손들에 묻혔다. 공화주의자가 많은 노동당이지만 당 대표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침묵하라고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추모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개인적 동기는 다르지만 국장은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화려한 국장 의례를 만들어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국장은 대영 제국의 세력 과시였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너다인의 말을 빌리면 수십만이 조문했던 1965년 윈스턴 처칠의 국장은 힘을 잃어가는 영국을 위한 "진혼곡"이었다.
2022년 국장은 과거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고 브렉시트 연장선으로 안정적인 공동체를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다. "근대 사회는 여전히 신화와 의례를 필요로 한다"는 이안 길모어의 말대로 합리성과 효율성이 넘치는 생활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찰스 3세에게 유리하다. 개인으로서는 인기가 없어도 제도로서의 왕은 갈등보다 통합을 추구하고 상업적 이익 추구와 거리를 두는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조만간 있을 대관식은 신화와 의례가 필요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들 것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기후 변화 등 가혹한 현실 문제는 왕실 폐지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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