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담악물 위에 길쭉하게 떠 있는 산이다. 대청댐이 만들어진 뒤, 산 아랫부분이 물에 잠겨 생겼다.
정명조
서기 554년, 백제 성왕이 죽었다. 옥천 관산성 싸움에서 신라군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싸우는 아들 부여창에게 가던 길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백제는 왕권이 떨어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삼국 통일 발판을 마련했다.
옥천은 백제 사비에서 신라 서라벌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두 나라가 싸울 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문헌에만 해도, 옥천에 산성이 19군데 나온다. 군북면 추소리 뒷산에도 산성이 있다. 부여창이 쌓았다는 환산성이다. 고리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고리산은 환산(環山)의 옛 이름이다.
환산은 관산성 싸움이 벌어진 자리로 여겨지는 곳 가운데 하나다. 그곳에 오르면 대청호로 흘러가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화천에서 나온 물이 소옥천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 대청호에 다다른다.
한낮의 무더위가 수그러지고 역대급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대청호를 찾았다. 환산에 오르고, 부소담악을 걸었다.
환산
옥천 군북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환산로를 따라 철도와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들머리가 나온다. 대청호 오백리길 7-1구간 '환산길'의 끝점이기도 하다. 계단 시작하는 곳에 '환산의 메아리', '아흔아홉 산봉우리 환산' 표지석과, '환산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졌다.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풀이 무성하고, 길이 없어졌다. 지도를 보며 오락가락 몇 번이나 헤맸다. 거미줄이 얼굴을 연달아 덮었다. 늦여름 모기가 땀 냄새를 맡고 따라다녔다. 1971년에 세운 통일동산이라는 표지판도 있었다. 희미하게 길이 있는 곳에 등산 리본이 하나 있었으나 이내 길이 없어졌다. 들머리에 들어선 지 한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산등성이에 올랐다.
길이 뚜렷하고, 양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멧돼지가 헤집고 다녔는지 움푹 파인 자국이 계속되었다. 겁이 나서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옥녀봉에 도착했다. 제3보루다. 보루는 적을 막기 위해 돌을 쌓은 자리다. 산등성이를 따라 고리산성 보루가 여섯 개 있다. 봉수대도 있다. 옥천 월이산에서 신호를 받아 대전 계족산으로 전달한 곳이다. 나뭇잎 사이로 물길이 보일락말락 한다. 쉬운 산등성이 길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