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셰어(SHARE) 활동가
박상환
헌법에 기초해 세워진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개인의 자율과 자기결정권을 기초 이념으로 삼고 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구체적인 항목으로 들어가면 '자기결정권'에 대한 생각은 국가별로 엇갈린다.
낙태죄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50년간 많은 인권들이 전진했지만, 아직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선진국 중에는 1988년 대법원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을 내린 캐나다 정도가 임신 중단과 관련한 어떤 규제도 없는 상태다.
여기에 지난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폐기하면서 미국인들의 임신 중단 권리가 50년 전으로 후퇴한 상황에 놓였다.
한국은 어떨까.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0년까지 관련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이후 별다른 법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는 국내에서 관련 분야에서 인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단체다.
2015년 활동가, 연구자, 변호사, 의사들이 연대체 형식으로 만나면서 관련 분야의 연구와 포럼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이듬해 12월에는 상담자와 의료인이 참고할 수 있는 국내 첫 임신중단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발간하기도 했다.
지난 22일,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인 최예훈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은 임신중지를 어떻게 의료 서비스로 제대로 자리 잡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점"이라며 임신중단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신중지를 어떻게 의료서비스로 자리 잡게 할 것인가
- 지난 6월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권을 폐기하는 결정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파장이 컸습니다.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국내 활동가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하고 같이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그 이유가 미국 상황이 한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아니에요. 어차피 세계적인 논의 방향은 '처벌 금지'와 '안전한 임신중지'로 가고 있는데, 미국이 쫓아오지 못하고 있는 거거든요. 오히려 반면교사 해야죠. 언론이 미국이라고 주목을 하는 것 같은데,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 어떤 점에서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은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2020년까지 관련 법률을 마련하라 했지만 안 되었죠. 모자보건법처럼 추가 개정할 것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형법상 '낙태죄' 효력이 없어졌으니 사실상 비범죄화 상태입니다. 법적인 상황은 미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리가 나은 것이고요. 이제 임신중지를 어떻게 의료 서비스로 제대로 자리 잡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결정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사실 헌재의 결정문은 저희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런 내용은 아니었어요. 결과적으로 형법에서 낙태죄가 없어지긴 했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주수 제한이라든가, 여러 가지 불필요한 논의들이 나오는 근거가 되기도 했거든요. 다만, 실리적 측면에서 헌법 불합치 결정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우선 의사들이 위축되지 않게 됐어요. 물론 낙태죄가 있을 때도 중절 수술을 했다고 (의사를) 법적으로 처벌하진 않았지만 움츠러들게 되거든요. 불법이니까요. 셰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저조차 움츠러들어요. 하지만 죄 자체가 없어진 후로는 움츠러들 필요가 없게 되죠. 이 효과는 환자에게도 그대로 이전됩니다. 의사가 당신이 하려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얘기해줄 수 있거든요."
- 모든 의사가 그렇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020년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임신 22주 이후 낙태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의사들도 임신중지에 대해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여기에 따라 반응은 제각각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이전에는 임신중지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이 많았어요. 제가 주의 깊게 보는 건, 요즘엔 개인 병원 중심으로 임신중지 서비스를 광고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의사들 인식이 바뀌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건강보험 안에 임신중지를 포함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의사들의 태도가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❶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약에 대한 위험성은 크지 않습니다"
- 건강보험 안에 임신 중지를 포함시키면 어떤 부분이 달라질까요?
"1차적으로는 의료 비용이 낮아지지만, 무엇보다 의사들 머릿속에 '이건 엄연한 의료서비스다'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일부 병원에서는 지금도 의사들이 (임신중지) 수술하러 온 환자들에게 훈계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거든요. 그런 행동을 못 하게 되는 거죠. 또 국가 차원에서 정확히 임신중단 관련 통계를 내고 올바른 정책 대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전수 통계조차 제대로 못 내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 일각에서는 여전히 임신중지 이슈에 대해 태아 생명권을 거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 후보 당시, "저출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사회 이슈가 된 이후로 태내 생명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 존속과 관련된 일이 됐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태아 생명이 중요하니까 낙태를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모순적이에요. 장애 여성의 낙태는 모자보건법에서 허용되는데, 그럼 장애 여성이 임신한 태아는 생명권이 없다는 건데 말이 안 되죠. 그동안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결국 국가 입장에서 필요한 건 (경제적 활동이 가능한) 인구거든요. 그렇다면 과연 (임신중지를) 생명권 이슈로 다루는 게 맞느냐 하는 거죠.
인류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임신중지는 항상 공동체 안에서 금지되거나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임신중지가 없었을까요? 아니거든요.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는 건데, 국가가 '그냥 낳아라' 식으로 말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얘기죠. 무엇보다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정책으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를 전혀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 오랫동안 '낙태'가 범죄로 인식되면서 관련 지식도 부족한 상황인데요, 임신중지에 대한 중요한 오해, 뭐가 있을까요?
"임신중지는 크게 약(유산유도제)과 수술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보통 초기에는 약을 쓰고, 이후엔 수술해야 한다고 알고 계신데 그렇지 않습니다. 약은 의료적으로는 임신 전(全) 기간에 걸쳐서 사용할 수 있어요. 약의 위험성도 생각보다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임신 12주~14주 이내에 쓰면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정도의 부작용밖에 없어요."
-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정도의 부작용이이라고요?
"네, 맞아요. 유산유도제는 크게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 두 가지가 있는데 '미프진'이라고 알고 있는 제품명은 이 두 가지 약이 함께 들어있는 콤비팩이에요. 이중에서도 미페프리스톤은 임신 중에 나오는 호르몬을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미소프로스톨은 현재 식약처에서 위궤양 같은 치료제로만 승인하고 있는데, 출산 직후에도 자궁이 잘 수축되지 않을 때 질이나 항문에 넣으면 빠른 효과를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유산되었을 때도 의사들이 사용하고 있고요. 의료현장에서는 사용한 역사가 오래된 약입니다. 세계보건기구 가이드라인도 의사 처방 없이 복용할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