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와츠키노씨와 동기들나가사키승원양성소에 입교한 1943년 4월에 촬영된 사진. 가장 오른쪽 아래에 앉아있는 것이 니와츠키노씨다. 사진에 점이 찍혀있는 동기들은 전쟁 중 전사했다.
박광홍
그러나 환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가사키 항공기승원양성소 시기의 기억은 구타로 점철된 것으로 남게 됐다. 니와츠키노씨와 그의 동기들은 온갖 구실로 '빠따'를 맞았다. 매일 반복되는 매질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비행 연습 중인 상공에서까지 매가 날아들었다. 당시의 구타를 회상하는 니와츠키노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모두가 맞는 생활이었으므로 불만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군인을 천황의 '신하' '수족'으로 규정하고 복종과 헌신을 요구하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암송하며, 니와츠키노씨는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혀갔다. 오직 사명감만으로 10개월 간의 험난한 교육과정을 수료한 그는 1944년 2월 정식으로 파일럿이 돼 히메지해군항공대(姫路海軍航空隊)로 배치됐다.
곧이어 두 달 뒤 오키나와해군항공대로 전출된 그는 아름다운 절경과 맛있는 음식들을 즐기며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제국 일본의 전쟁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각지에서 전해져오는 '옥쇄' 소식을 들으며, 니와츠키노씨는 스스로의 비극적 운명을 직감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 대한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이뤄져도 일본군이 여기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던 현실은 그 운명을 방증하고 있었다.
"영영 이별이겠지..."
1945년 3월, 니와츠키노씨는 또다시 전출명령을 받았다. 오키나와를 떠나는 길, 친하게 지내던 전우 하나다의 배웅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니와츠키노씨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동기 하나다가 공항까지 배웅해줬는데요. '그동안 서로 참 많이 신세를 졌구나. 아마 이것으로 영영 이별이겠지'라고 말하더군요.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니와츠키노씨가 오키나와를 떠난 직후,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처절한 전투 속에서 오키나와해군항공대는 전멸했다. 동기 하나다의 말대로 그날의 작별은 영원한 이별이 됐다. 그러나, 니와츠키노씨는 오키나와 옥쇄 소식을 들으면서도 전우들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전쟁지도부는 패전으로 치닫는 현실 속에서 일선 장병들의 끝없는 헌신만을 요구할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적인 희로애락은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폐허가 된 일본 국토를 내려다보며 니와츠키노씨는 일본을 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니와츠키노씨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처음 배치된 것은 1945년 5월의 일이었다. 특공대 배치는 지원이 아닌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니와츠키노씨는 열악한 성능의 연습기가 특공기로 투입되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특공에 나가는 것이 일본 전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