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의실에서 베트남전쟁민간인학살사건 생존자 응우예 티 탄 씨와 목격자 응우옌득쩌이 씨가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와 함께 국가배상소송 진술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희훈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증인신문은 오후 2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6시간 30분 내리 진행됐다.
소송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62)씨와 목격자이자 탄씨의 친척인 응우옌 득쩌이(82)씨가 법정에 나왔다. 이들은 1968년 2월 12일 '퐁니(Phong Nhị) 사건'의 피해자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1대대 1중대 부대원들이 퐁니 마을 주민 70여 명을 사살하거나 총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퐁니 사건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중에서도 증거가 많이 남은 사례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의 자료(1995), 주월미군 감찰보고서(1968~1969), 2000년부터 이어진 1중대 부대원들의 인터뷰 증언 등이 있다. 특히 당시 인근의 남베트남 민병대와 미군은 퐁니마을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고, 한국군이 빠져 나간 직후 마을로 들어가 사진 촬영, 사망자 확인, 생존자 구출 등의 수습 활동을 벌였다.
탄씨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한국 정부에 책임을 묻기 위해 2020년 4월 한국 정부에 3100만 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지금까지 다투고 있다. 그리고 이날 한국의 법정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첫 법정 증언을 했다.
"그날 집엔 이모와 이모 아들, 언니, 오빠, 동생, 동네 오빠와 나 7명이 있었다. 엄마는 장사하러 아침에 밖을 나갔다. 그날 오전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 7명은 방공호로 들어갔다. 이후 마당으로 들어온 한국군은 방공호의 우리들에게 수류탄을 들이밀며 고함쳤다. '안 나오면 수류탄을 던질 것'이라고 느꼈다.
무서워서 방공호를 나갔고, 나가는 순서대로 다 총을 맞았다. 언니(11세)와 동생(6세)이 죽었고, 오빠(15세)와 난 심하게 다쳤다. 이모는 집에 불을 내려는 군인을 말리다가 칼에 여러 차례 찔려 죽었다. 수세미 나무 아래, 입에 총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던 동생이 기억난다. 엄마를 찾기 위해 나가는 길에 배 밖으로 창자가 계속 쏟아졌다. 손으로 잡아도 나왔다. 이후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탄씨 증언 내용 종합)
저녁 6시 증인신문을 시작한 탄씨는 54년 전 총에 맞은 경험을 담담하게 증언했다. 어떻게 한국군임을 아느냐는 질문엔 "한국 군복의 얼룩무늬 옷과 모자를 썼고,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했다"며 "얼굴만 봐도 그들이 한국인임을 구분할 수 있고, 한국군 외형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학살 사건의 피해는 54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고 했다. 탄씨는 가난 등의 이유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고 총상의 후유증과 정신적 고통이 계속 남아 있다고 밝혔다.
"8~9개월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 1년 정도 화교 집에서 아이 돌보는 일을 했다. 나는 내가 고아라고 생각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녔다. 12살 때부터 해방 후(1975년 15세)까지 학교를 못 다녔는데, 이 때문에 크게 절망도 했다. 지금도 복부가 꼬이는 고통을 일주일에 3~4회는 느낀다. 그때를 기억하면 너무 소름이 돋고 악몽도 꾼다."
탄씨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콩이 한국군으로 위장해 양민을 학살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재까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에 공식 사과를 한 적도, 관련 조사를 추진한 적도 없다.
탄 씨는 "한국 정부 입장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를 죽인 이들은 한국군이 맞다"며 "한국 정부는 사실을 인정해서 피해자들을 위로해 달라. 고통을 덜 느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총을 쏜 군인들을 향해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이에게, 어린이들에게 총을 쐈습니까? 군인들이 적을 죽이지 않고 왜 죄가 없는 사람을 죽였습니까?"라고도 물었다.
사과·인정 않는 한국... 생존자 "내가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