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플래카드전주대, 우석대, 원광대 학생들이 함께 플래카드를 걸어두었다. 위는 한 역사동아리의 플래카드이다.
오항녕
"8년이면 충분하다, 진실을 밝혀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모든 국민의 의무입니다."
최근 학교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는, 길을 가던 한 사람이 말했다.
"아직도 세월호 얘기야?"
그 얘길 듣고 순간 내 속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오갔다.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안다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않냐는 반감. 다른 하나는 사건 이후 만 8년이 지났는데 사회의 상례(喪禮)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역사를 공부하는 나도 조선의 예학(禮學), 예송(禮訟)에 대해 허례허식이라고 단죄하는 관점을 먼저 배웠다. 쓸데없는 절차라고 말이다. 같이 살던 사람과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들이, 그 헤어지는 아픔을 연착륙시키는 장치가 상례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거기에 고인과 가까웠던 정도를 구분해서 부모는 3년, 8촌은 석달, 하는 식의 5복(五服)이 있었다.
아무렴 살았을 때 맺은 관계가 있는데, 마음이든 생활이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이런 절차를 허례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 한국 사회의 경박한 애도, 심지어는 애도에 대한 모독이 발견된다면 이런 교과서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경험, 인간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입이라도 조심할 일이다.
장례의 기억,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과정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경황없는 와중에 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모 상조회가 하라는 대로 어머님 상을 치렀다. 대도시에 살고 있던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친척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으니 상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삼년상의 절차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삼일장이나마 잘 치르는 게 다행이었다.
개인의 경우든, 세월호 같은 사회의 경우든, 상례에 준하는 연착륙 과정이 있어야 한다. 왜?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니까. 자식이 죽자 슬픈 나머지 눈이 멀어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고사를 남겼던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조차도 자식을 잃은 뒤의 여생을 살아야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에서 빠져나와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고인과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아내, 자식, 친구, 동료, 그리고 이 사회 사람들과도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과 다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통상 우리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조회의 도움으로 사흘만에 가까스로 상례를 마치는 것은 바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3년씩 부모님 무덤을 지키는 여묘살이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어렵고, 삼우제, 상식, 졸곡을 챙기기에도 어림없다. 부모님도 그럴진대 하물며 친척, 친구, 스승과 제자, 동료의 관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마음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로 생기는 정신질환이 있다면, 현대사회의 상례가 허겁지겁 치러지면서 너무도 많은 관계에서 영원한 이별이 어설펐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가정하고 있다.
정문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며 다시 사회의 상례를 생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원인 규명이 늦을 수도 있고, 규명한다 해도 미흡할 수 있다. 그래서 상례가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까이는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와 선생님들, 친구들부터,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시민들까지 어정쩡한 상례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삶이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상례를 인간답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진상을 알고 어디까지 알지 못하는지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갖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위정자가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시민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이게 정당에 따라, 지지 세력에 따라 다를 일인가.
세월호를 정쟁 도구로 활용하는 일부 정치인... 절망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