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다' 기사로 일하다 해고돼 3년째 싸우고 있는 곽도현씨
이희훈
- 처음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낸 게 3년 전이다.
"2019년 7월 타다 드라이버 90여명이 속한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갑자기 타다 본사가 배차 감축을 했다며 업체 측에서 22명 드라이버를 뺀 나머지 70명과는 함께 가지 못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거다. 주말에만 근무를 했던 나도 선택 받지 못했다. 단톡방에서 항의 글이 빗발쳤다. '내가 누구누구보다 더 많이 근무했는데 왜 나는 빠졌냐', '부당한 처사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선택된 22명을 데리고 따로 단톡방을 만들었다. 하루 아침에 70명이 해고됐다.
졸지에 다음날이 마지막 근무일이 돼버렸다. 잠이 안 왔다. 새벽 5시쯤이었다. 단톡방에 함께 있던 나이 드신 한 분이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너무 억울해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살다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이제 나이가 많아서 다른 직장 구하기도 어렵다고 하셨다. 문자를 읽으니 잠은 더 안 오더라. 그날 밤을 샜다. 그때 처음 결심했다. '이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누군가는 나서서 뭐라도 해야 한다'."
- 첫 지노위 결정부터 뜻대로 안 됐다.
"화는 나는데 아무것도 모르니 너무 힘들었다. 처음엔 협력업체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뒤에 쏘카라는 큰 기업이 숨어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오십 평생 살면서 이런 문제를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라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내가 남의 문제에 끼어들면 뭐가 달라지냐' 이렇게만 생각하면서 적당히 살았으니까. '노동자성'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지노위에서 처음 각하 결정이 나왔을 때도 포기할까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평일 일자리도 잃게 돼 벌이가 끊긴 상황이었다. 근데 지노위 판결이 나자마자 그전까진 하나도 관심 없던 언론들이 '타다 기사는 근로자가 아니다'라면서 기사들을 쏟아냈다. 이번 판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쏘카 측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적극 홍보하는 것 같았다. 너무 화가 났다. 이대로 접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겠다 싶었다. 재심을 신청했고, 2020년 5월 중노위에서 근로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 받았다. 그땐 정말 기뻤는데..."
-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홀로 진행했다.
"타다에서 드라이버로 일하는 사람들은 다 하루하루 먹고 사느라 바쁘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이라는 절차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단톡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같이 하자고 연락을 많이 돌렸다. 새벽에 문자를 보내셨던 나이 지긋하신 분께도 전화를 드리고 함께 하자고 했다.
하지만 당장 오늘 내일 생계가 걱정인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싸움에 뛰어들자고 하기가 좀 그랬다. 혹시 이번에 찍히면 다시 이쪽 일 못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들도 많았다. '이길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그렇다고 장담도 못하겠고. 나도 그냥 '에잇' 욕이나 한 번 하고 다른 일 찾아 떠날까 생각도 많이 했다. 근데 그러면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라 외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어떻게 타다 운전기사로 일하게 됐나.
"3년 전 첫째 아들이 고3, 둘째 아들이 중3이었다. 평일에 하던 일이 급여가 좀 적었는데 맞벌이를 하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일을 쉬게 됐다. 내가 뭐라도 더 해야 했다. 잡코리아를 뒤지다 '주말 타다 드라이버 모집' 광고를 봤다. 바로 이력서를 넣었고 그 주 주말부터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두 달 남짓 일하는 동안 난 '타다'를 참 좋아했다. 20대 후반이던 IMF 때 취직이 너무 힘들어 한 5개월 정도 법인 택시를 몬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너무 달랐다. 고객들도 서비스가 좋다고 호응하니 단순히 소속감을 넘어 '타다 드라이버'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강했다. 그런데 이번에 재판 과정에서 쏘카 측은 자꾸 내가 과거에 무슨 일 했던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묻더라. '타다'와 싸우는 내가 경쟁 업종인 택시업계에서 의도를 갖고 보낸 사람 아닌지 대놓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프리랜서'라는 눈속임을 '혁신'으로 포장하는 플랫폼 기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