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갔을 때 찍은 가족사진
조혜민
'빨간버스' 운전기사 아빠의 파업
퇴직하기 전인 2011년, 아빠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파업에 들어갔다. 무수히 많은 아빠의 파업을 봤었지만 당시의 파업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 지켜본 첫 파업이었어서 마음이 힘들었다. 당시 나는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아빠의 '빨간 버스'를 자주 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파업이 시작되자 뉴스는 시끌벅적했다. 언론사들은 '시민들의 발 묶어', '시민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라는 말들로 아빠가 파업을 왜 했는지 보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함'을 앞다투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인터넷 기사들에 달린 댓글에는 온갖 욕이 쓰여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후회한 건 아빠에게 휴대전화 작동법을 적극적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아빠는 잠을 쪼개어 자며 일해야 했기에 휴대전화의 많은 기능 중 알람 작동법을 알게 되었을 때, 유독 좋아했다. 하지만 그 휴대전화을 통해 아빠가 마주해야 할 현실은 참담했다.
'아빠도 이 댓글들을 보겠지.' 너무나 화나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무렵, 한 댓글이 보였다.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댓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보니 내 친구의 이름이었다. 아이디를 보니 내 친구의 별명이었다. 내 친구가 쓴 댓글이었다.
나는 아빠의 파업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정당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달라, 젊은 후배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빠의 요구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런 한편, 나는 두려움을 갖곤 했다. 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아빠의 파업을 이해받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친구들에게 이 상황을 전하면서도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내 친구가 우리 아빠의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며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아빠가 휴대전화를 볼까 걱정했지만, 사실 문제는 댓글이 아니었다.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은 온라인 공간에만 있지 않았다. 당시 파업은 버스 운행을 멈춰서는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배차 시간, 승객들의 안전을 고려해 적정 승객 인원만을 태운, 말 그대로 '안전운행'을 하는 게 파업의 방식이었다. 버스기사들만의 파업이 아닌 우리들의 파업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출퇴근에 불편함을 느낀 승객들은 빨간버스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욕을 했다.
이런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빨간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계속 피했다. 그렇게 피하다가 결국 피하지 못한 어느 날, 버스기사에게 욕을 내뱉은 승객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그렇게 종점에서 내린 나는 무작정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게 그 말해주었다. "네 탓이 아니야."
돌아보면 아빠의 파업은 말 그대로 아빠만의 파업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군가에게 나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걸 일깨워주었고 또한 누군가의 파업에 마음을 보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지 않더라도 응원과 지지의 말을 보내고, 당신의 파업은 결코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곁에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보내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