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풍군 실향민들이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아 망원경으로 강건너 고향을 살펴보고 있다.
이혁진
개풍군은 일제 해방 당시만해도 엄연한 대한민국 영토였다. 이남 우리땅이었다. 그러다 6.25전쟁과 정전협정으로 개풍군은 졸지에 이북땅이 되고 말았다. 이에 개풍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장래 수복할 지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공식 행정명칭도 '미수복경기도 개풍군'이다.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개풍인들의 삶은 이남과 이북으로 갈라졌다. 이남으로 피난해 삶을 이어온 개풍인 다수는 6.25전쟁일을 고향에 남겨 둔 가족들에게 '속죄'하는 날로 여기고 있다.
개풍군민들은 6.25전쟁 때 이북5도민(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도 출신)과 달리 비교적 늦게 피난을 떠났다. 6.25전쟁 당일 새벽 개성과 개풍을 지나는 북한군 동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 직전에도 북한의 도발 징후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개풍군을 포함한 인근 개성이 평온을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잘 묘사돼 있다.
반면 이북5도민들은 북의 남침과 중공군 개입에 따른 1.4후퇴 당시 이남 도처에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 조직적으로 피난했다. 이때 북한을 탈출한 주민은 대략 100만 명을 헤아린다.
흥남철수작전에 따른 부산과 거제도 피난처와 함경도민들이 강원도 속초에 조성한 '아바이마을', 황해도 출신들이 김제애 만든 용지농원마을 등은 대표적인 실향민 집단거류지이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개풍군민 다수가 가까운 김포, 강화, 인천 등으로 급히 피난했다. 이곳에 일가나 친척들이 거주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뒤따랐다. 대부분 그곳에 2~3일 잠시 머무를 요량이었다. 그런데 강화에 가려면 북한의 감시와 추격을 피해 밤에 쪽배를 이용해야 한다. 이때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렵게 피신했지만 더 이상 고향에 갈 수 없고 세월은 무심하게 70여 년이 흐르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