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옥자 할머니와 할머니가 가리킨 헛간. 할머니와 그 헛간을 배경으로 필자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박용규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거주지'에 대한 연구는 이전부터 있어왔다. 신복룡 교수는 1981년 1월 16일 당시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원동골에 살고 있는 강금례와 그의 아들 박승규를 만났다.
신 교수는 박승규의 안내를 받아 원동골에 있는 전봉준의 구거(舊居)를 보았다고 기술하였으며, 전봉준의 옛집이 "양기와를 씌운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2)고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곡리 원동골은 동곡리 동곡마을을 가리킨다. 산외면 면사무소 직원은 필자에게 '동곡 마을'을 다른 말로 '원동곡', '원동골'로 쓰기도 한다고 알려줬다.
계속해서 신 교수는 자신의 책 <전봉준 평전>에서, 원동골 답사에서 얻은 최대 수확은 김개남의 종손녀인 김씨 노파(1902년생, 산외면 동곡리 원동골 거주)로부터 "전봉준이 전주화약 이후 이곳에 머물던 당시의 구전이며 그의 가족 관계"를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던 일이라고 밝힌다. '이곳'은 동곡리 원동골을 가리킨다. 1894년 전주화약(1894년 동학농민운동 중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한 뒤 정부와 맺은 화약-편집자 주) 이후 전봉준이 산외면 동곡리 원동골, 즉 동곡 마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1984년 <주부생활> 김석환 기자는 산외면 동곡리 동곡마을에 살고 있는 박승규를 직접 취재한 적이 있다. 김 기자는 박승규의 안내를 받아 같은 마을에 있는 전봉준의 생전 거주지를 직접 보았다면서, 그 집을 사진으로 게재하였다.
김 기자는 그 사진을 <주부생활> 1984년 6월호에 실으며 "동곡리에서 거주할 때 전봉준이 살았다는 집. 지금은 주인도 바뀌고 집도 허물어져 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 필자는 김 기자가 사진을 게재한 '전봉준이 살았다는 집'의 위치가, 바로 현재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동곡마을 160-3' 장소와 일치한다고 본다.
전봉준 연구해온 학자 송정수의 확언
전봉준 장군의 가계 연구의 대가인 송정수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거처지를 분명히 제시하였다. 그는 본인 저서 <전봉준 장군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서 마지막 거처지를 "동곡리 160-3번지"로 확인하였고, 사진까지 게재하였다.4)
그러면서 송 교수는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박옥자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초 시어머니로부터 이 집터에 (전봉준) 장군의 옛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앞서 필자가 만났던 분이다.
한편, 앞서 신복룡 교수가 1981년 1월 만났던 강금례(1905∼1983)와 박승규(1986년 사망)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122번지(동곡 마을)에서 일생을 보냈다. 필자는 강금례·박승규의 집과 전봉준 장군 마지막 거주지인 '동곡리 160-3번지'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같은 동곡 마을에 있음을 직접 확인하였다.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에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고, 다음날인 3월 30일(양력 4월 24일) 새벽 2시에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41세였다. 이후 전봉준은 '산외면 동곡'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한 채 숨졌다.
그의 가족들이 살던 산외면 동곡은, 동곡리 '지금실 마을'과 동곡리 '동곡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실 마을에는 현재 전봉준의 혁명 동지였던 김개남 장군의 집터를 소개한 표지판이 아래와 같이 세워져 있다. 안내 표지판이 있으면 찾기가 훨씬 쉽기에, 참 좋아보였다.
'전봉준 마지막 거주지'에도 표지판 세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