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관, 유영국 '작품' 101.5×81cm 1961(왼쪽), 130×89cm 1966(오른쪽)
김형순
유영국은 일본으로 가 요코하마 상선학교를 진학하려 했다. 자퇴 문제 등으로 거절당하자 결국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미술공부를 하기로 한다. 그는 일본에서 국적이나 출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도쿄 문화학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동갑인 이중섭도 만났다.
이 학교는 군국주의 시대임에도 자유로운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별천지였다. 이 대학 일본인 창립자 니시무라 이사쿠의 교육철학은 확고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군국주의 위세가 너무 세 이 학교도 끝내 폐교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일본 전위미술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 독립미술협회, 신조형예술그룹 등에서 활동했다.
시각적 다변성에 호기심 많았던 그는 1942년부터 일본 '오리엔탈 사진학교'에서 수학했고, 사진 콜라주를 통한 신조형을 탐구해 후에 산과 자연에서 앵글 구도를 추출하는 방식을 설정하는 데도 도움을 받는다. K2관 2층엔 그가 1942년에 찍은 경주 사진도 소개된다.
드디어 1941년에 태평양전쟁 발발로 군국주의가 더 강화돼 실험 미술은 숨 쉴 곳이 없어지자 그는 1943년 귀국해 부친 일을 돕는다. 1944년 김기순 여사와 결혼, 가장이 되어 그림을 잠시 접고, 양조장 경영인이 돼 성공했다. 다음해 서울대 교수였던 딸 유리지도 낳았다. 이 금속공예가는 일본 강점기에 소실된 부친의 1938년 'R3작품'을 다시 제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