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작성된 납북귀환어부의 현역병 입대를 제한하라는 병무청의 지침 공문
변상철
나이가 어린 사람은 어려서 지령을 받고, 나이가 많은 선장이나 기관장은 간부니까 지령을 받았다며 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시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고문을 받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도 모두 같은 고문을 받았다.
고문받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것만큼 괴롭고 무서운 것은 없었다. 곧 자신도 저렇게 고문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마치 단체 기합을 받을 때 눈을 감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의 체벌 소리를 들으며 기다릴 때의 공포감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렇게 폭력적인 조사가 끝나고 속초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도 다른 형태의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우리는 반공법으로 수감되었잖아. 그러니까 유치장에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반 깡패들(피의자) 그놈들이 우리더러 '간첩'이라면서 패는 거야. 그런데 경찰이 그걸 가만히 보면서도 제지를 하거나 말리질 않아.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모른 척하는 거야. 그리고 작은 방에 수십 명이 들어가 있으니까 잠도 칼잠을 자야 하는 거야. 그럼 잠이 오나? 좀 삐딱하면 그 깡패 놈들이 발로 막 우리를 차는 거야. 그렇게 어렵게 유치장 생활을 했어.
또 그다음에 법원으로 가야 되잖아. 법원 재판을 하러 가면 포승줄 묶어서 굴비 엮듯이 다녔어. 참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야. 몇 개월 살다가 판사가 집행유예라고 판결해서 나왔는데 그 유치장에서만 한 두 세달 살았던 거 같아. 집행유예라고 판사가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나가라고 하니까 나왔지."
유치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은 김인섭씨를 비롯한 납북귀환어부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며 받아야 할 차별과 폭력의 시작이자 축소판이었다. 누울 곳도 없는 공간과 사회에서 다시 밀려나야 하는 삶. 그것이 납북귀환어부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처지 그대로였다. 어딜 가나 경찰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주로 밤에 집으로 찾아오는 경찰. 결국 그는 서울로 도피했다.
"나는 반공법 위반자라고 해서 군대를 못 갔어. 그래서 20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갔어. 영등포에서 넝마주이(헌 옷이나 헌 종이, 폐품 등을 주워 모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인) 했어. 직장에 올바르게 들어가지를 못하니까 그런 거라도 하면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거기서도 경찰 3명이 따라다니더라고. 어디 경찰인지는 모르는데 거기도 감시를 하더라고. 넝마주이 하는데도 그런 곳까지 따라다니더라고. 그래서 5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어."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군대에 가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1974년 병무청 작성의 문서에 의하면, 1975년 이전 징병검사 수감자 중 현역병 입대대상자는 이를 모두 취소하고 전원 보충역에 편입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1976년도 징병검사 수감자는 징집 등급을 4급으로 정하고, 병적기록표 처분사항에 '귀환자'라고 표시토록 하였다. 이를 위해 각 시도 경찰국에서 파악하고 있는 납북귀환어부 명단을 입수하여 현역병으로 입대하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과거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될 당시, 학살의 근거로 삼은 것이 보도연맹이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국민은 국민이 아니었다. 언제든 끌려갈 '적'으로 간주되었다. 납북귀환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져야 할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잠재적 위험 요소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은 헌법이 정한 국민의 권리에 대한 명백한 차별행위이다.
"오래된 일이라 모른 척하면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