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이벤트홀인 원메릴본에서 열린 부커상 시상식에 참석한 정보라 작가와 안톤 허 번역가(오른쪽). 2022.5.27
연합뉴스
책을 번역하려 한 사람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저주토끼>는 그대로 소설의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SF 작가들은 2010년대에는 장르 소설을 실어주는 지면이 정말로 없었다고 회고하곤 했다. 좋은 글을 써도 장르문학이라는 사실만으로 '읽어주지 않는다', '팔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받는다면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
아무리 창작 자체에 의미를 두더라도 소설이 혼잣말이 아닌 이상, 작가가 취미생활이 아닌 이상, 지면과 관심이 필요하다. 장르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에게는 '해도 된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장르문학 독자들에게 이번 <저주토끼>의 후보 지명 소식은 전혀 '불발'이 아니다.
관련 인터뷰에서 안톤 허 번역가는 한국에 기성세대 문학 외에도 풍부한 장르문학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 SF를 번역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 장르문학은 비평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만큼 오히려 번역을 통해 작품성이 재발견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좋은 번역은 좋은 번역가에게서 나온다. 좋은 번역가는 창작자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작가와 번역가에게 함께 수여된다. 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주토끼>만 해도 '안녕, 내 사랑'에 등장하는 '1호'는 성별이 없었다가, 영어로 번역되면서 성별이 정해졌다.
안톤 허 번역가는 '1호'를 '그녀'로 지칭하며 이야기가 상투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신경 썼다. 번역가의 감각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곳에서 번역된 정소연 작가의 '집'의 경우, 등장인물인 '그'는 영문 번역 과정에 'G'가 되었다. 한국어처럼 일부러 성별을 특정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감각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번 부커상 소식을 두고 한국문학의 세계 진출을 이야기하는 기사가 많았다. 정말로 세계적으로 진출하려면 국내의 창작 환경이 그만한 밑바탕이 되어주어야 한다. 좋은 작가, 좋은 번역가만이 아니라 좋은 독자가 필요하다. 장르문학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저주토끼>와 같은 책이 소설의 무덤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를 기록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풍부한 장르문학'이 성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독서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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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씁니다. 특히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단행본으로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를 썼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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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저주토끼'... 우린 이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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