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죽도시장 할매호떡에서 일하는 고명희 씨.
경북매일 자료사진
아직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지 않았지만,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다. 당연했다. 바로 코앞에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이 있었으니.
경북 포항 죽도시장 입구에 조그맣게 자리한 호떡 노점. 고명희(62)씨는 그 자리에서 14년을 일했다. 앞서 고씨의 어머니가 1980년부터 '할매호떡'을 시작했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호떡을 구워 판 세월이 벌써 42년.
지난해부터는 고씨의 아들까지 일을 거들고 있으니 '호떡집 3대'라 불러도 무방하다.
지난 5월 31일, 인터뷰는 호떡을 굽는 번철(燔鐵)을 사이에 두고 진행됐다. 3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는 얼마나 더 더울까?
그럼에도 낙관적인 웃음이 그려진 고씨의 얼굴은 환하다. 고생을 고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이유가 뭘까.
"오래전 엄마에게 방송사에서 인터뷰 제의가 왔어요. 그때 엄마는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한 거라곤 내 자식 키운 것밖엔 없다. 남을 도와준 것도 아닌데 무슨 인터뷰할 자격이 있나'라며 거절했죠.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당연지사 그게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했다. 물었다.
"그래서요? 생각 끝에 뭘 했습니까?"
"얼마 전에 아프리카 우간다(Uganda)에 아이들을 위해 작은 학교를 짓는데 2천만 원을 기부했죠."
정말이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들려주는 고씨의 이야기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할매호떡은 좌판을 차려 운영되는 가게다. 우간다에 기부한 돈 2천만 원이면 시장에 점포를 얻어 좀 더 편하게 장사를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글쎄요…. 점포를 세낼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그것보단 어려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호떡처럼 달콤한 사랑과 나눔
긴 시간 노점에서 일하고, 가끔은 예의 없는 손님도 맞아야 하는 고씨임에도 표정과 말투가 밝았다. 그러한 삶에 대한 긍정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고 싶었다.
- 호떡을 만들어 팔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엄마가 1980년에 여기 자리를 잡았다. 나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부치는 엄마를 돕기 시작한 게 2005년 즈음이다. 3년쯤 반죽 제대로 만드는 것부터 호떡 맛있게 굽는 방법 등을 배웠고 2008년에 일을 이어받았다."
- 짧지 않은 시간이다. 많은 것이 변했을 것 같은데.
"1980년엔 호떡 한 개가 100원이었다. 내가 이어받았을 땐 500원이었고. 지난해까지 700원을 받다가 올해 밀가루 값과 식용유 값이 너무 올라 할 수 없이 1천 원으로 올렸다. '내가 못 먹는 음식은 만들지 말자'는 것이 우리의 장사 원칙이다. 그건 엄마와 내가 똑같다."
-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때는.
"나는 신앙을 가졌다. 거기서 사랑과 나눔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 갔었다. 그곳에서 가난 속에서도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아직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인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나라인 우간다는 학교를 짓는데 한국처럼 큰돈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내 형편껏 기부를 했는데, 아이들보다 내 마음이 더 행복했다.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잘 웃는 고씨의 맑은 얼굴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긍지와 보람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어렵지 않게 짐작됐다. 조건을 달지 않고,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기부와 봉사를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천 원짜리 호떡을 얼마나 팔아야 2천만 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그걸 남에게 선뜻 내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고씨에겐 사랑과 나눔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감이 호떡보다 더 달콤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