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게스 에스칸다리 그륀베르크 프랑크푸르트 부시장
이은희
지난 5월 29일(현지시각), 독일 헤센 주 프랑크푸르트 휠야 광장에서 '휠야의 날'이 열렸다. 광장 이름은 '졸링엔 외국인혐오 방화살인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9살 소녀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휠야'란 터키말이 '아름다운 꿈'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휠야를 기억한다는 것은 소녀의 잃어버린 꿈을 안타까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꺾인 그 꿈을 다시 피어나게 하려는 중의적인 희망의 선언이기도 하다.
1993년 5월 29일 새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도시 졸링엔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독일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휠야를 포함한 5명의 젊은 여성과 소녀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들이 일부 크게 다쳤다. 전조가 없지 않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인민공화국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재통일된 독일에서는 이주민과 망명자에 대한 혐오가 사회적으로 심해졌다. 망명법이 개악되면서 망명희망자들이 당하는 구조적 압박은 무거워졌다.
이미 몇 번의 차별과 혐오의 테러사건이 있었고 졸링엔은 그 정점이라고 했다. 졸링엔 방화살인사건은 차별과 혐오 범죄의 대명사가 되었다. 희생자의 이름을 달고 있는 작은 터 휠야 광장은 그래서 미움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해 결의를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차별과 혐오로 인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2020년 2월 19일에 신나치주의자가 저지른 하나우 총기난사 사건에서는 9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도시의 공공 기림물이 되기까지 20년 세월
휠야 광장의 기림물은 프랑크푸르트 무역박물관 앞의 '해머링 맨'의 축소형 같다. 사람이 망치를 들어 나치 문양을 두들기는 자세를 하고 있다. '터키 민중의 집' 무스타파 코르크마츠 운영위원에 따르면, 설치과정에서 저작권 문제, 나치문양 금지조항 등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설명과 설득의 과정을 꾸준히 거쳤다.
반대와 방해도 만만치 않았다. 휠야 광장이란 이름이 이곳에 붙은 것은 1998년이지만, 이 기림물이 도시의 공공 기림물이 되기까지는 모두 20년이 걸렸다고 무스타파 코르크마츠 운영위원이 전해 준다.
이제 이곳에서는 매년 휠야의 날이 열린다. 휠야 광장은 프랑크푸르트 다문화와 평화공존을 만들어나가는 연습장이 되어가고 있다.
연대와 참여
연대와 참여 없이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나르게스 에스칸다리 그륀베르크 프랑크푸르트 부시장(녹색당)은 현지 보켄하임 지역의 풀뿌리단체 '미래 보켄하임'의 아네테 뫼니히 활동가, '터키 민중의 집'의 무스타파 코르크마츠 운영위원 등을 향해 휠야 광장을 조성하고 꾸준히 연대행사를 해 온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나르게스 에스칸다리 그륀베르크 부시장은 또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끊임없이 '이주민 배경'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경계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청소년들은 모두 도시를 풍성하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