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18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 신청서를 들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이날 나토 가입을 위한 공식 신청서를 나토에 제출했다. 두 나라는 70여 년간 군사적 비동맹주의 정책에 따라 중립 노선을 지키며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채 나토와 협력 관계만 유지하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나토 가입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의 턱밑 접근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이제는 나토를 머리맡에 둘 수도 있는 상황에 처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서북쪽의 스웨덴과 핀란드가 17일(이하 현지 시각) 나토 가입신청서에 서명하고 18일 이를 제출했다.
북유럽 국가인 두 나라는 서유럽 대 러시아 구도로 전개되는 유럽 국제정치를 관망하는 태도로 내려봐왔다. 그랬던 두 나라의 나토 가입 추진이 세계적 주목을 끈 것은 우크라이나 침공 1개월 뒤부터였다.
지난 3월 28일에는 응답자 53%가 나토 가입에 찬성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핀란드에서 보도됐다. 이틀 뒤에는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스웨덴 총리가 "어떤 식으로든 나토 가입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표명했다. 4월 25일에는 핀란드 국방부가 자국 군함이 나토 군함과 함께 연합군사훈련을 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이런 움직임을 누구보다 환영한 나라는 미국이다.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선언한 지난 12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을 통해 "우리는 핀란드나 스웨덴이 나토 가입을 신청한다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러시아는 당연히 화난 모습을 보였다. 같은 날 러시아 외교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이런 조치가 가져올 책임과 결과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한 뒤 "보복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1년 정도 소요될 수 있는 두 나라의 가입 절차가 결국 무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30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와 밀접한 터키의 동의까지 받아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양국의 가입 여부는 시간이 좀 더 흘러봐야 명확해진다.
한국인들에게 북유럽은 은빛 얼음 같은 이미지와 함께 연상되기 쉽다. 거기서 발산되는 차가운 이미지는 북유럽이 세계질서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이 지역은 세계 정치는 물론이고 자기 지역의 유럽 정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냉랭한 객관적 태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전에는 북유럽 국가들도 유럽 정치에 활발하게 관여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이 그에 해당한다.
미증유의 전쟁, 중립의 필요성
바사 왕조의 에리크 14세 때 시작해 요한 3세 때 종결된 '북유럽 7년 전쟁(1563~1570)'에서 스웨덴은 덴마크·폴란드 등을 꺾고 발트해 지배자가 됐다.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덴마크·독일·폴란드·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러시아에 둘러싸인 호수 같은 바다를 지배하게 되면서 북유럽 최강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스웨덴은 그 지위를 17세기 내내 유지했다. 이 시기에 스웨덴은 폴란드나 덴마크는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제압했다. 이 시기의 북유럽은 '노르딕 밸런스'로 불리는 중립정책과 함께 연상되는 지금의 북유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랬던 스웨덴이 움츠러들기 시작한 계기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상인 로마노프왕조의 표트르 1세(재위 1689~1725)가 보여준 공격적인 대외정책이다. 표트르 1세가 서유럽과의 교류를 위해 발트해 지배권을 빼앗고자 함에 따라 러시아·덴마크·폴란드 대 스웨덴의 북방 대전쟁(1700~1721)이 발발했다. 러시아가 이 전쟁의 승자가 됨에 따라 스웨덴은 물론이고 북유럽도 전반적으로 위축됐다.
13명의 유럽 교사 및 교수가 쓴 <새 유럽의 역사>는 "1721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특히 스웨덴은 17세기에 유럽 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최근 2세기 이상의 세계사를 좌지우지한 대형 전쟁들은 주로 유럽에서 나왔다. 유럽발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로 인해 세계사는 미증유의 전쟁을 경험했다. 러시아 때문에 크게 덴 적이 있는 북유럽은 이런 혼란상을 지켜보면서 중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나폴레옹전쟁(1797~1815)과 제1차·제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이 지역은 중립 지대로 굳어져갔다.
그런데 북유럽 국가들의 중립정책이 외형상 비슷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각국의 사정에 따라 제각각의 모습을 띠어왔다. 그래서 언뜻 보면 중립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도 있었다.
그 같은 다양성과 관련해 2004년 8월 <동아시아 논총>에 실린 김진호 제주대 교수의 논문 '북유럽 평화체제로서 노르딕 밸런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국제정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 간(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 및 핀란드)에 약간의 차이를 부여했다"면서 "우선, 스웨덴은 동서 간에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고수해 나가기를 바랐으며,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고 핀란드는 1947년 2월의 파리평화조약에 의해서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다양한 외관, 북유럽의 중립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