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 등대
윤일희
꼭대기에 올라서니 등대가 보였다. 한때는 묵호항을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을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호령했을 등대의 위용은 그 옛날의 영광을 생각하기에는 좀 작았다. 이는 나의 터무니없는 평가절하일 텐데, 바닷길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등대가 무슨 마천루라도 될 줄 착각한 관광객의 허황됨일 테니 말이다.
등대 근처 '도째비골'은 '스카이밸리'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도째비'는 도깨비를 부르는 강원도 말이다. '스카이밸리'라는 영어 이름은 어색하지만, 이를 한국어로 옮긴 하늘 마을은 제격이지 않은가. 이곳에 하늘 산책로라 불리는 '스카이워크'가 우뚝 세워져 있는데, 족히 40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이는 꽤 높은 조망대다. 그 옆으로 와이어를 타고 공중을 횡단할 수 있는, 보기에도 아찔한 '스카이 사이클'이 설치되어 있었다. '쫄보'의 심장으로는 언감생심이다.
등대를 둘러본 후 노골담길의 명소라는 '바람의 언덕'에 다다랐다. '폭풍의 언덕'이 문득 스쳐 지나갔는데, 물론 소설의 으스스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살랑대는 바람이 보드라운 사랑스러운 언덕이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묵호항을 오른쪽 한편에 두고, 바다 경관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진다. 사진 한 컷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폭이다.
바다 한쪽엔 이곳이 어떤 삶의 역사를 가졌는지 증명하듯, 화력발전소 굴뚝이 멀리 보였고, 항만엔 대형 크레인이 골리앗처럼 서 있다. 일제시대 무연탄 수출항이었고 어업기지였던 역사를 가늠하게 하는 풍경이다. 타지인에게 저 항구는 아름다운 바다로 연상되겠지만, 묵호 사람들에겐 무연탄을 나르고 오징어와 명태를 잡아 생계를 이었을 삶의 현장이다.
묵호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관광객은 끊임없이 즐거움으로 치환한다. 장이라도 많이 보는 날이면, 양손에 무거운 짐들고 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를 이곳을, 막상 이곳 주민이라면 좋아라 환호하지 못할거면서 말이다
이곳 주민들이 고단한 삶을 일구었을 산동네 제일 꼭대기엔 카페가 들어서 있다. 관광객의 본령은 그저 '행복'인 걸까. 왁자지껄, 수없이 눌러대는 사진 촬영 음, 안면 가득 피운 웃음이 기본 사양이다. 행복을 증명할 임무라도 부여받은 듯, 너도나도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신다.
이 호들갑스러운 여행객들의 소란을 이곳 주민들은 어떻게 견딜까, 미안해진다. 노골담길도, 바람의 언덕도 지극히 아름답지만, 누군가의 내밀한 삶의 현장을 만인의 관광장소로 만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의 지나친 상술이다. 나라도 안 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에 내려오는 내내 뒤 꼭지가 뜨거웠다. 그래도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본 제 나름껏 아름다운 묵호 바다는 못 잊을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풍경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 짧은 여행의 종착지, 동네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