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7월 음독 기도 후 퇴원하자마자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시위를 벌이던 고 정우형씨의 모습.
김성환
- 고인은 물론이고 본인도 삼성의 노조 와해 피해자다. 노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나는 원래 IT(컴퓨터 및 주변기기) 기사로 들어가 여름이면 에어컨 기사 일까지 맡았다. 밤에는 내근으로 IT를 맡고 밤에는 에어컨 콜을 받다 보니 살이 엄청 빠지고 삶이 피폐해졌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건당제 임금으로만 연 5천만 원 벌었다.
정말 밤낮없이 일한 거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내가 사람이 아닌 기계처럼 느껴졌다. 고객 응대 과정에서의 수치심도 많이 느꼈다. '매우 만족'을 받지 못하면 반성문을 써야 하고 아침 7시에 출근해 정신교육도 받아야 했다. 인권이 없었다. 그래서 노조를 시작했다. 돈 때문에 한 것이 아니다."
- 해고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내근과 외근 모두 나가면서 몸무게가 50kg도 채 안 나가게 됐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몸이 너무 힘들어 그만두려고 하니 회사에서 소속을 창원에서 마산으로 이동시키며 IT 기사만 맡기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조건을 믿고 마산으로 이직하니 이직한 당해에만 에어컨 기사를 안 맡기더니 다음 해부터는 다시 맡기더라. 이후 위장폐업으로 사실상 해고노동자가 되었다. 그게 2014년이다."
- 고인이 해고 후 8년 동안 피폐한 삶을 살았다는 식의 보도가 있었다.
"그건 언론의 소설이다. 해고노동자들은 나름 열심히 삶을 살고자 노력해왔다. 고인 역시 가만히 있다가 죽은 게 아니다. (해고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보면 된다."
- 고인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고립과 좌절이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한다. 삼성도 물론 가해자지만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역시 가해자다. 상처는 노조로부터 더 받았을 것이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노조에서 해고노동자에게 조금의 관심만 있었어도 고인이 이런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 노조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게 무슨 얘기인가?
"지난 1월에 2심 재판에서 법원이 우리의 노동자 지위를 인정했다. 그런데 지회는 우리를 해고자로 인정해주고 있지 않다. 오죽하면 내가 금속노조 앞에서 시위해 금속노조 부위원장이랑 만나기도 했다. 금속노조는 아예 상황을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박씨가 말한 재판은 지난 1월 26일 박씨 등 2013년 당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직원이었던 4명이 삼성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항소심을 뜻한다. 서울고등법원은 항소심에서 이들과 삼성전자서비스 사이에 근로자파견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 항의 이후 어떻게 되었나?
"이후 금속노조에서 지회에 어떻게 된 일인가 따졌나 보다. 나중에 지회 간부가 나 때문에 본인 앞길이 막혔다며 역정을 냈다. 해고자를 걸림돌로 생각하는 노조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나중에 금속노조랑 지회랑 서로 책임 전가하느라 바빴다.
금속노조가 상급단체라면 지회에 지시를 해야 할 것 아닌가. 해고자의 인권은 어디 갔으며 해고자를 책임질 금속노조는 어디 있는가. 노동자를 못 지키는 노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지난 2018년 11월에 삼성전자서비스와 지회가 직접고용을 협상했다. 직고용 협상 전후로 지회의 태도에 차이가 있나?
"직고용 이전에도 지회는 삼성해복투로부터 나오라고 회유했다. 삼성해복투에 계속 있으면 도움을 줄 수 없다며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갈라치기를 시도했다. 그래도 연대가 지금처럼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직고용이 이루어지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임단협에 부담이 된다며 해고자와 함께하길 꺼려했다. 노조의 관료화라 본다. 투쟁 의지는 사라지고 영리단체가 되었다. 직고용에 이르기까지도 최종범·염호석 열사 두 분의 희생 덕분 아닌가."
"해고노동자에 대한 연대가 사회 전반적으로 파괴된 게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