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3가역 부근 일명 '을지로 노가리골목' 을지OB베어와 만선호프. 2021.4.26
권우성
날씨 좋고 배 부른데 술이 모자란다면 역시 노가리 안주에 맥주를 마시는 것이 '국 룰'이다. 을지OB베어는 몇 년 전부터 '노가리 골목'이라 불리며 사람들이 가득 찬 골목에 가장 먼저 문을 연 생맥주 집이다. 맥주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목이 찢어질 것 같은 탄산이나 골이 띵할 정도로 차가운 살얼음은 맥주의 미덕이 아니라고 믿는 나에게 을지OB베어는 내게 생맥주의 이데아에 가깝다.
치킨과 떡볶이까지 판매하면서 굳이 '노가리 골목의 맥주집'이라는 브랜드를 고집하려는 옆 집 '만선 호프'에 비해 노가리와 쥐포 정도밖에 없는 을지OB베어의 안주도 "가볍게 맥주나 한 잔 더 할까?"라는 술꾼들의 입버릇에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래서일까. 서울시는 지난 2015년에 을지OB베어를 오래도록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집이라며 '백년 가게'로 선정했다. 역시 좋은 건 누구에게나 좋은 법.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어디일까
을지로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신 건 아마 모친과 함께였던 것 같다. 결혼 전 을지로의 인쇄소에서 일했던 모친은 당시 유명한 을지로의 한량이었다. 처음으로 을지로에서 같이 술을 마셨던 십수 년 전의 어느 날, 당연히 자연스레 모친을 인도하려 했으나 종로통과 무교동, 을지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친에게 어느새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니가 술을 마셔봤자지, 이 구역의 한량은 나야"라는 표정이었달까.
그때 모친과 함께 찾은 집은 '동원집'이었다. 감잣국을 시켜놓고 앉아 30년 전 모친의 전성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난 당시 맞이한 나의 음주 전성기를 뽐냈다(취해서 서로의 얘긴 안 듣고 자기 할 얘기만 했다는 이야기).
동원집에서 을지OB베어, 길 건너의 영락 골뱅이로 3차까지 이어진 그날, 모친은 그날 골목 골목을 누비면서 그때와 달라진 풍경, 이제 떠난 사람들,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 변해버린 당신의 모습, 하지만 여전한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평소 자기의 이야기나 지나간 것들에 대해 별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던 모친은 그 골목에서, 그 공간에서 30년 전의 자기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신이 났다.
정말이지, 기억은 공간에 저장되는 것일까. 을지로엔 그런 곳이 많이 있다. 아니 을지로뿐일까. 오래된 도시 서울엔 그렇게 세월이 켜켜이 쌓이고 딱 그 세월만큼의 기억이 쌓이고 그렇게 쌓인 기억과 시간이 올올이 엮여 '가치'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 '가치'를 문화라 부르기도 하거나 분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오래된 골목이나 오래된 가게들을 다시 찾는 것은 단지 레트로의 유행이나 신기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모양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공간에 쌓여 있는 것들에 대한 공명. 그리고 그 위에 덧붙이는 내 시간과 기억들. 그렇게 많은 것들이 전승되고 발전한다.
문제는 만선 호프가 아니다
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을 둘러싼 문제들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하나둘씩 가게를 늘려가던 만선 호프는 지난 1월, 을지OB베어가 입주한 건물을 구입했고 계속해서 퇴거를 요구하다 지난 4월 결국 강제 집행했다. 이미 8호점, 9호점으로 골목을 가득 채운 만선 호프는 기어이 을지OB베어 자리에 10호점을 낼 요량인가 보다. (만선 호프 사장이 을지OB베어가 있는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려고 했다"는 인터뷰도 있었으니, 백년 가게를 쫓아낸 자리에 화장실이 들어서는 걸 봐야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