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정서적 돌봄‘신체적, 정신적, 정서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는 가장 암울한 때에도 자신을 믿어주고, 좋은 때나 어려운 때나 오래도록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리베카 울리스,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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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환우에게 이런 존재가 있다면 좋겠지만 불건강한 관계만 피해도 다행인 경우도 많다. ADHD를 가진 경우 가스라이팅에 취약하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자기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만큼 상대방의 기대치에 쉽게 압도되기 때문이다.
나도 몇 년이나 그런 관계 속에 있었지만 그게 정서적 착취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스스로 내 감정과 의견이 큰 가치가 없다고 여겼고, 이렇게 부족한 나를 상대가 '참아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제를 겪는 사람일수록 내가 이 관계에서 편안하고 만족스러운지 돌아봐야 한다. 죄책감이나 부채감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직시하고, 물리적, 정신적, 시간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결국 주변에서 정서적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만큼 내가 내 마음을 돌봐줄 수밖에 없다. 시작은 "으이구, 나 참 짠하다"라는 생각이라도 좋다. 자기치유의 첫 단계는 자기연민이다.
잠들기 전에 '약손' 의식을 하고 있다. 마음챙김 안내를 들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고 내 마음이 어땠는지 들여다본다. 중요한 건 그 후 두 손으로 내 머리와 팔을 쓰다듬는 거다. 어구, 그랬어? 오야오야, 잘했다. 오구오구, 애썼네. 오글거려도 해보라고 해서 해봤는데, 왜 권하는지 알겠다. 이 짧은 시간이 오늘의 감정소모를 내일로 이어가지 않게 해준다. 내 수고를 내가 알아주는 건 제일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된다.
오래 쌓인 감정은 매일 조금씩 체기를 풀어준다. 몸에서 감정이 걸려 있는 곳을 느껴보고 정성들여 쓰다듬는다. 들숨에 신선한 에너지가 들어온다고 상상하고, 날숨에 부정적 에너지가 빠져나간다고 상상하며 심호흡한다. 성격 같아선 속을 양말처럼 뒤집어서 털어내고 싶지만, 온도를 높여 녹여내야만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나를 바라봐주어야 주변과의 관계도 보인다. 일단 나를 둘로 나눠보자. 내가 나의 할매가 돼주는 마음으로 오늘밤 셀프쓰담. 슬프다고? 아니다. 착각이다.
너무 많은 '나'
내 상처는 특별하지 않다. 내가 겪은 고통들은 끈질겼지만 평범했고, 정작 고통이라고 내놓을 만한 물성이 없었다. 세상에 하찮은 고통은 없지만 우월한 고통도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인지라, 자격지심과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이 환장 콜라보를 한다. 내 금지옥엽 같은 고통을 누가 가벼이 여기진 않을까 자주 날이 서고, 남의 호의도 순수하게 믿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대고 있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호구 잡힌 거 아냐?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슈퍼 을' 같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관계 권력이 없다고 느끼는 증거니까.
자기연민이 너무 견고해질 때는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고 했다. 내 마음 밑바닥엔 어떤 고집스러움이 있는데, 마치 비를 맞지 못해 딱딱해진 땅 같고, 내 문제가 우선이라고 소리 없이 악을 쓰는 것 같다. 상대를 위로하려고 시작한 대화마저 '기승전나'로 흘러버리곤 한다. 내 속엔 아직 내가 너무도 많고, 내 마음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걸로 나를 구박하진 않는다. 앓아온 시간에 비해 알아준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빠르게 나아지는 셈이다. 시간이 더 지나 충분히 비에 젖으면 갈라진 땅이 초록을 품게 될 거다. 그때까지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숨만 붙어 있으렴." 애인과 내가 주고받는 농담이다. 건강해야 한다거나 행복하게 살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아만 있으라는 말. 요구 중에 제일 마음 가벼운 요구다. 아닌 게 아니라 이토록 부주의하고 앞뒤 안 가리는 내가 40년 가까이 살아 있다는 거, 대단한 업적이지 않은가.
마음을 보내는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