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양조장 '토플링 골리앗'의 뉴잉글랜드 IPA.
이현파
[기사 수정 : 26일 오전 10시 26분]
몇 주 전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한적한 곳을 가고 싶었지만, 어디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상관없었다. 다른 곳에서 돗자리를 펴고 맛있는 맥주를 마시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일행은 사진 명소라는 벚꽃나무 앞에서 줄을 서있는 대신, 맥주를 마셨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보다는 지금 당장 잔에 따라 놓은 맥주와 돗자리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특히, 아름다운 외관을 과시하는 맥주인 뉴잉글랜드 IPA(New England India Pale Ale)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주스 같은 맥주, 맥주 마니아 사로잡다
뉴잉글랜드 IPA란 단어 그대로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매사추세츠주, 코네티컷주, 로드아일랜드주, 버몬트주, 메인주, 뉴햄프셔주 주)에서 탄생한 스타일의 IPA를 뜻한다. 기존에 흔히 만나볼 수 있던 IPA와는 결이 다르다. IPA 하면 연상되는 쓴맛도 덜하고, 송진 향도 잘나지 않는다.
망고나 오렌지, 자몽 등 열대 과일의 풍미가 코를 장악한다. 이윽고 첫 모금이 침샘을 자극하고 다량의 홉이 만들어내는 열대 과일 향, 아련한 쓴맛과 부드러운 질감이 공존한다. '드라이 호핑'이라는 과정을 통해 홉의 향을 배가시키는 것은 필수다.
이 맥주를 보게 된다면, 거품이 줄줄 흐르는 맥주보다는 편의점이나 동네 마트에서 만날 수 있는 오렌지 주스가 떠오를 것이다. 주스를 유리잔에 따르면 맑지 않아 주변 풍경이 비치지 않는다. 뉴 잉글랜드 IPA 또한 그렇다.
탁한 노란색의 외관을 띠고 있어 헤이지 IPA(Hazy IPA)라는 별명 역시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맥주는 효모를 필터링(여과)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뉴잉글랜드 IPA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귀리와 밀 맥아를 통해 색깔은 진하게, 맛은 더 부드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 오묘한 맥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미국 버몬트주에 위치한 양조장 알케미스트(Alchemist)에서 생산하는 헤디 토퍼(Heady Topper)가 출발점이라고 여겨진다. 2004년에 탄생한 이 맥주는 201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맥주 시장에 일약 돌풍을 일으켰다.
동부 지방에서 등장한 이 맥주는 중부, 서부로 퍼져나갔다. 토플링 골리앗, 트릴리움, 아더 하프, 트리하우스 등 수많은 양조장이 앞다퉈 뉴잉글랜드 IPA를 내놓았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화석의 이름을 딴 '킹 수'(King Sue)는 국내 맥주 마니아들에게도 열광을 받고 있는 슈퍼스타다.
뉴 잉글랜드 IPA는 실험을 거듭하는 오늘날의 맥주를 상징하는 존재다. 2020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그레이트 아메리칸 비어 페스티벌'에 출품된 8806개의 맥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맥주 역시 뉴잉글랜드 IPA(377개, 전체 출품작 중 4% 이상)였다.
한때 국내에서는 낯선 스타일이었지만, 지금은 국내에서도 뉴잉글랜드 IPA가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어메이징 브루잉의 첫사랑 IPA, 플레이 그라운드 브루어리의 '홉스플래쉬' 등이 뉴잉글랜드 IPA 시대의 문을 열었다.
서래마을의 바틀샵 겸 펍으로부터 시작된 크래프트 브로스, 에일크루, 미스터 브루잉 등의 양조장 역시 뉴잉글랜드 IPA 맛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몽유명 IPA'를 만드는 인천 맥주 역시 뉴잉글랜드 IPA에 입문하는 데에 있어 좋은 선택지다.
'거기서 거기'인 맥주에 질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