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새롭게 지어진 선원사의 모습조선초에 폐사된 뒤 오랜 세월동안 폐허로 남았던 선원사터의 앞마당에 새롭게 선원사가 재건되었다.
운민
결론이 어떻게 나든 고종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갔던 왕에겐 대장경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것일까? 하루빨리 개경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왕은 죽어서도 이 강화 땅에 묻혀있다.
그곳은 봄이면 진달래로 산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고려산 남쪽 자락이다. 고려왕릉 중 강화읍과 가까워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지만 이곳의 주인은 국화리 학생 야영장이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가파른 암도를 30분간 오르면서 고종이 묻혀있는 홍릉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유난히 가파른 경사를 힘겹게 오르기를 반복해 저 멀리 병풍석, 난간석 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의 왕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 고종 홍릉이란 안내판만 없었으면 일반 백성의 민묘와 선뜻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그 당시 현실 자체가 왕릉을 건설할 수 있었던 여유 있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선원사 같은 대형 사찰을 짓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기록에 따르면 최우의 진양부 같은 저택은 누각이 12채가 있고 연못이 끝도 보이지 않는 규모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왕실의 위엄이 땅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그마한 문인석 4기가 왕릉 한단 아래에 기립해서 죽은 왕을 보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근래에 조성된 듯싶다. 고종은 고려궁지에 살면서 다른 왕들보다 더욱 불교 도량에 집착했다고 전해진다. 보통 도량은 승려가 기도문을 읽는데 몇몇 도량은 고종이 직접 암송할 정도였다.
국난을 기도로라도 극복하길 바랐을 것이고, 실권이 없는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는 간접적으로 나마 무신정권의 종말에 관여했고, 세자를 몽골에 보내 쿠빌라이를 섬기게 되면서 고려왕조가 원나라에 종속되었지만 그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조선왕조 고종의 릉도 홍릉이라 불린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이 두 임금의 인생 굴곡이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강화에 남아있는 고려의 왕릉과 선원사지를 살펴보며 그 시대를 반추해 보았다.
이번에 고려왕릉을 둘러보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찾기도 힘들뿐더러 특히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녔던 과정 자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지자체나 관련 기관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고 특히 우리 스스로 고려왕릉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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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팟케스트 <여기저기거기>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obs라디오<굿모닝obs>고정출연, 경기별곡 시리즈 3권, 인조이홍콩의 저자입니다.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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