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일애국지사 고 김지영 선생 추모위원회’는 7일 아침 창원시립상복공원에서 “통일애국지사 고 김지영 선생 추모제”를 열었다.
윤성효
젊어서 교원노조 활동하다 해직된 뒤 평생 평화·통일을 외쳐온 고(故) 김지영 선생이 끝내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향년 89세.
경남 통일애국지사 고 김지영 선생 추모위원회는 7일 오전, 창원시립상복공원에서 통일애국지사 고 김지영 선생 추모제를 열었다. 고인은 지난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33년 창원에서 태어난 선생은 옛 부산수산대(현 부경대)를 나와 1958년 울산에 있는 중학교에서 생물교사로 교단에 섰다. 이후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근했던 고인은 1960년 4.19혁명 직후 결성된 교원노조에 함께했다.
그는 나이 31살에 부산 중등 교원노조 상임집행위원을 맡았고, 교원노조 활동을 벌였다.
추모위원회는 당시 "이승만 정권 때 국가보안법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4.19혁명 뒤 만들어진 교원노조는 국가보안법 반대를 외치고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외쳤다"며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이틀 전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 대표들이 회합을 하기도 했다. 교원노조는 남북 학생 회합을 지지했던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교원노조를 탄압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고인은 생전에 이렇게 증언하기도 했다.
"5‧16쿠데타가 터진 뒤 교원노조는 바로 탄압을 받았다. 저는 그때 부산에 있었고, 교원노조뿐만 아니라 혁신정당과 각급 노동단체 간부들도 영장 없이 예비검속에 걸렸다. 부산의 한 장소에 모였는데 1천 명은 넘었을 것이다.
대개 5월 18일부터 5월 20일 사이에 붙잡혀 왔다. 제헌절(7월 17일)에 풀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와서 교단으로 복귀한 사람들도 있었고, 한 10% 정도는 군사쿠데타 정권이 시키는 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교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지영 선생은 1961년 대전형무소에 구속됐고 이후 공주로 이감되어 2년간 복역했다. 이때 그는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1963년 출소 이후 서울에서 구두 수선으로 생계 유지하다 1970년대 부산에서 제화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