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나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정권이 바뀔 때마다 책임총리제가 거론된다. 윤석열 대통령당선인이 지명한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놓고도 그런 설왕설래가 생기고 있다. 당선인 측은 한덕수 내각을 통해 책임총리제를 구현시키겠다고 주장하고, 더불어민주당 측은 한 후보자의 역량에 회의적 시각을 표출하고 있다.
군부독재가 끝난 뒤인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행정부 교체기 때마다 '책임 대통령제'가 아닌 '책임총리제'가 자주 거론됐다. 1990년대에는 실세 총리라는 표현도 많이 사용됐다. 책임총리제는, 총리와 대통령의 권력을 나눠서 서로 견제하게 하는 제도를 뜻한다.
당선인들이 책임총리제를 강조하는 것은 자기 집권기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측면도 있다. 대통령 권능을 남용하지 않고 절제 있게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그런 방법으로 표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헌법은 국민 대표자인 국회를 통해 또 다른 국민 대표자인 대통령을 견제한다. 전통적인 삼권분립에 기초한 이 방식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출현을 막는 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들은 헌법이 부여한 것보다 훨씬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다. 국회의 견제 기능에 한계가 많음을 보여주는 부조리 현상이다.
책임총리제는 그에 대한 보완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임총리가 국회와 다른 방식으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존재한다.
책임총리제의 역사
한국 현대사에서 책임총리제가 비교적 명확하게 작동한 시기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김종필 내각과 이해찬 내각 때에 이 시스템이 비교적 잘 작동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의 이회창 총리도 책임총리 사례로 언급될 여지가 있지만, 이 사례는 김종필·이해찬 사례와는 명확한 차이를 띤다. 1993년 12월 23일자 <조선일보> 좌상단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총리가 된 직후인 그달 22일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이회창 신임 총리는 "우리 모두 실세가 돼야 합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실세 총리, 실세 장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책임총리가 되겠다는 바로 그 의지 때문에 정확히 4개월 뒤인 1994년 4월 22일 해임됐다.
이회창 총리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는 헌법 제86조 제2항의 후반부를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 총리의 권능이 행정각부에 미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총리에게 실제로 기대한 것은 제2항 후반부가 아니라 전반부, 즉 '보좌' 부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이회창 총리가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신경 쓰는 것을 불편해 했다. <이회창 회고록> 제1권에 따르면, 1994년 4월 22일 청와대 회동 때 두 사람은 고성을 주고받았고, 이회창이 '그만두겠다'고 하자 김영삼이 '그러세요'라고 받아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회창 사례에서는, 총리는 책임총리가 되고자 했지만 대통령은 책임총리를 원치 않았다. 김종필 사례와 이해찬 사례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책임총리제에 관한 양해 내지 이해가 존재했다.
김대중 정권은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 연대에 입각한 대선 승리에 기초를 뒀다. 그래서 책임총리제로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책임총리 김종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정권의 경우에는, 지지 세력과 집권 세력과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지향하는 이런 의지들의 총합이 책임총리의 등장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지지 세력과 집권 세력의 의지가 가장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정치연구> 2013년 봄호에 실린 정치학자 한상익의 논문 '한국 혼합대통령제에서 책임총리제의 특징과 한계'는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책임총리제를 축으로 당정 분리와 책임장관제를 운영하면서, 이를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한 분권형 국정운영 시스템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그런 뒤 "노무현 대통령이 이전 대통령들에게 비해 보다 분권적인 리더십을 보였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한다고 평가한다. 노무현 스스로 대통령의 권능을 억제하는 리더십을 추구한 것이 책임총리제를 가능케 했다는 데에, 정치학계가 대체로 동의하는 것이다.
책임총리제가 김대중·노무현 때 잠간 빛을 발했다가 이내 시들어버린 것은, 두 시기에 책임총리제를 촉진했던 요인들이 그 뒤 약해졌기 때문이다. 영향력 차이가 아주 크지 않은 두 정당의 대선 연합을 통해 새로운 행정부가 구성되거나, 지지세력·집권세력·대통령이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상황이 그 후에는 나타나지 않았거나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정치구조나 정치현실이 책임총리제에 우호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특별한 사정이 생기거나 특별한 사람들이 집권하지 않는 한 책임총리제의 실현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책임총리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이 분명히 책임총리제를 뒷받침하는데도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에 의한 대통령 견제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책임총리에 의한 대통령 견제의 필요성이 거론된다. 그런데 총리는 국회보다 약하다. 국회보다 약한 총리가 그런 역할을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전 국회의원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한덕수 총리 후보자를 '방탄총리'에 비유하며, "여소야대 국회를 원만하게 넘기려는 윤 당선인의 생각"이라고 짚었다. 그는 4일 TBS라디오 '신장식의 신장개업'에서 "노무현 정부서 많은 일을 했던 인물 아닌가. 민주당 의원들이 함부로 할 수 없다"며 "민주당으로선 곤란한 총리"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대통령이 지명하고 대통령이 언제든 해임할 수 있는 총리가 무슨 책임을 하나"라며 "대통령제에서 책임 총리는 있을 수 없다, 허상"이라고도 덧붙였다.
"국민의 머슴"이라는 윤 당선인... 효과적으로 권력 분산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