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엄마 아빠가 서로를 정말 싫어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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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요지는 아빠의 흉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의 말 주머니에선 오색빛깔 다양한 분노와 화, 묵혀온 옛날 일까지 줄줄이 딸려 나왔다. 이럴 때 보통의 다정한 딸이라면 엄마 편에 서서 "맞아, 맞아", "엄마가 아니면 누가 아빠랑 살겠어", "맘 넓은 엄마가 참아야지" 같은 말로 엄마의 분노를 김장 김치 숨죽이듯 잘 재워놓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딸이 아니었다.
나는 음식 조리도 못하지만 사람 조리는 더 못하는 인간이라 돌려 말하는 법 없이 맘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엄마!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이혼하자."
"뭐?"
"그렇잖아. 솔직히 아빠도 엄마가 없어봐야 소중함을 알지. 엄마도 언제까지 아빠 눈치 보면서 살 거야. 엄마 혼자 살면 더 잘 살 걸? 위자료 받고 갈라서자."
엄마의 당황한 표정이 핸드폰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이혼이 어데 쉽나... 나도 혼자 살믄 얼마나 좋겠노"라고 답한 뒤...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희 때문에 마지못해 사는 거지." 엥? 갑자기? 나 때문에? 이 대목에서 나는 좀 웃겼다.
엄마의 마흔 넘은 아들 딸도 졸혼이 코앞인 마당에 우리 눈치 보느라 이혼을 못한다니... 엄마, 너무 속이 보이는 핑계 아니유. 우리 때문에 이혼을 못한다는 엄마 말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한참을 웃었다.
"엄마, 그냥 아빠한테 진심을 말해."
"뭐를!"
"시국이 이러니 외출하지 마세요. 당신이 걱정되요옹~ 떨어져 있기 싫어요옹~."
"야가 미친나."
"엄마도 막 짜증 내면서 말했지? 그러니 아빠가 또 버럭 했고! 그라고 둘이 붙어 있으면 맨날 싸우기밖에 더하나? 그렇게 꼭 옆에 붙어 있고 싶나?"
"하이고... 끊어라 고마!"
진심을 들켜선지, 편들어줄 줄 알았던 딸이 이혼하라고 해서 삐친 건지 엄마는 기겁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푸념 떨려고 말한 거였겠지. 이혼할까 말까의 기로에서 조언을 구하고자 한 게 아니었겠지. 하지만 나 역시 이혼하란 말이 농이 아니었고, 그것이 엄마를 위하는 나만의 (극단적인) 방식이었다.
가끔 남편과 나는 서로 자신들의 '엄마 고생 배틀'(누구 엄마가 더 고생했나 얘기하는 것)을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늘 우리 엄마 쪽이 더 우세하다고 생각한다(원래 자신의 부모들이 가장 고생함).
가난한 소작농의 맏딸로 태어나 아들밖에 모르던 외할아버지에게 살림밑천 취급받으며 일찍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우리 엄마... 그 후 백마 탄 왕자님처럼 아빠가 뿅 나타나 사랑 듬뿍 받고 사모님으로 살았다는 인생 반전도 없이 한평생 고생 외길만 걸어온 걸 우리 엄마...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식 때문에 말고, 남의 눈 때문에 말고, 본인을 위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런데 이혼을 종용하기엔 이 노부부의 사랑이 너무나 눅진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정말 엄마 말처럼 아빠가 몸서리치게 싫고 당장이라도 나가서 혼자 살고 싶다면 밥을 풀 때도 아빠 밥을 제일 먼저 풀 리 없고, 맛있는 반찬도 아빠 앞에 놔 줄 리 없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빠의 와이셔츠를 그렇게 정성스레 꾹꾹 다릴 리 없다(난 남편을 무진장 사랑하지만 절대 네버 다림질 안 해줌). 어느날은 우리 집으로 가출하라고 꼬셨더니 아빠 밥 걱정부터 하는 건 또 무슨 상황?
일흔이 가까운 부부가 사랑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