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은 용산, 관저는 한남동으로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후 집무실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로 옮기는 계획을 확정하면서 그에 따른 집무실과 주변 공간 구성 방안에 관심이 쏠린다. 윤 당선인과 인수위 측이 20일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을 종합하면 국방부 청사 건물에는 대통령 집무실, 비서실과 함께 기자실이 들어선다. 5월 10일 취임식 직후 용산 집무실에 입주하겠다는 구상에 따라 임시 관저는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리모델링 해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청와대 이전 TF 팀장인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은 설명했다. 사진은 20일 집무실이 들어서는 용산구 국방부 청사(윗 사진)와 한남동 공관부근 모습.
연합뉴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바야흐로 윤석열 당선자에게 '제왕의 관'이 올려졌다. '제왕적 리더십'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이 들끓게 된 것이다. 요컨대 그가 국가 백년대계인 집무실 이전 문제조차 여론수렴도 거치지 않은 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에 편향돼 있다는 비판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윤석열 후보는 정치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 역시 지니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안목으로 타자를 제대로 배려하지는 못하면서도 무속과 역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몰입한다는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따라서 국가 최고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날선 비판까지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이와 관련지어 <한겨레>는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는 윤 당선자의 '1호 결정'이야말로 '불통과 독주'라는 향후 5년 간의 국정운영 리더십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왜 윤 당선자는 황야의 늑대처럼 외로이 집무실 이전만을 애타게 울부짖고 있을까?
여우도 물을 건너려 할 때는 먼저 그 꼬리부터 물 속에 담가본다고 한다. 비슷한 목소리로 시경(詩經)은 '시작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읊는다. 명심할 일이다.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맺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하니 '높고 튼튼한 제방도 개미와 땅강아지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는 한비자의 말씀을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특히 8.15 이후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지배해온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빨리 빨리, 그러나 아무렇게나' 정신일 것이다. 이러한 '졸속의 원리'는 조그만 도로공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정책결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나라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역시 그 영향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대충대충'과 '후딱후딱'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의 정치이념이자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락부락한 한탕주의가 또 그 옆자리에 근엄하게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아울러 우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골인 지상주의'만을 높이 기려왔다. 그리하여 골인 이후에 어떤 꼴사나운 일이 벌어지든 그건 운수소관에나 맡길 일로 치부했다. 가령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려도 그것은 재수 없어 터지는 사고쯤으로 너그럽게 이해하곤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편리한 민간요법을 몸에 익힌 지 오래인 것이다. 요컨대 '삼풍백화점'은 무너졌지만 다른 건물은 멀쩡하니 그만해도 다행 아닌가 하는 말이다. 예전에 유럽을 난생처음 구경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체험이 있다. 그곳에 다녀와서는 충격을 받은 듯 제일 먼저 신기하다며 꺼내는 말이 대체로 '거, 유럽의 집들에는 울타리가 없어' 하는 식이었다. 담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미숙련 삽살개 정도면 충분히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수준의 나지막한 울타리가 전부다.
그에 비해 우리의 것들은 어떠한가? 유럽과는 판이했다. 요즘은 좀 보기 힘들어졌지만, 시멘트로 험상궂은 장벽을 쌓아올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담 끝에 촘촘히 박아놓고는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쳐 마치 토치카처럼 보이던 주택들이 특히 우리 도시에서는 흔히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왕왕 '맹견주의'라는 엉터리 경고판까지 터억 하니 걸려 있기 일쑤였다. 가히 완벽한 안보체제 구축이라 할만 하였다.
우리는 범람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까지 이렇게 완전 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요새 같아 보이는 담벼락도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안방까지의 진입은 식은 죽 먹기 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문 고리나 현관 출입문의 개폐장치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다. 부질없는 그 담장을 보고 안방의 보석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낙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하루 종일 열려 있기 일쑤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정은 성이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긴 하지만, 안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버티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자물쇠 장치와 물 한 방울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빈틈없는 창틀이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식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튼실하다.
우리는 정반대다. 겉은 맹수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속은 새우처럼 물러 터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형식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현실의 흐름 곳곳에도 폐수처럼 의연히 녹아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겉으로는 당당히 활개 치는 듯 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언제까지 진실이 아니라 꾸밈에만 매달려 있어야 할까